매일신문

퇴진하는 '왕회장'정주영

"국제 경쟁사회에서 성공하는 길이라면…"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이 31일 마지막 이 한마디를 남긴 채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안될 일'에 대한 도전과 근면함으로 요약되는 현대의 정신은 바로 기업인 정주영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대로 주위에서 '어림없는 일' '안될 일'로 보던 일(3부자 경영일선 퇴진)을 마지막으로 해내고 기업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마감했다.

그는 국가기간산업 발전을 이끈 경제인, 북방 외교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간외교관,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체육인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데도 10개에 달하는 국내외 명예박사 학위를 가진 노력파이기도 하다.

그는 강원도 북쪽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빈농의 6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나 노동판을 전전하다 쌀가게 점원으로 취직한다. 그 곳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스물두살에 신용 하나로 쌀가게 주인이 된다. 47년 현대건설 창립, 전후복구 사업으로 건설업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힘입어 소양감댐이나 발전소 건설에 참여, 62년 도급한도액 국내 1위에 올라섰다. 현대건설은 65년 국내 건설업체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시장 진출했다. 68년 2월 착공한 뒤 2년5개월만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계절을 느끼지 못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고 훗날 그는 회고했다.

76년 2월16일. '정주영의 신화는 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 준 날이었다. 9억3천만달러 짜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젓는 일도 그의 손만 거치면 현실이 됐다.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의 건축공사인 6억3천만달러의 알코바 공공주택 공사 수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업을 시작할 때 얘기는 주위를 더욱 기가 막히게 한다. 71년 조선소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하나만 달랑 들고 영국 런던 바클레이 은행을 상대로 차관유치에 성공했다. 조선소 착공과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기적도 연출했다. 67년에는 현대자동차를 세워 포드와 자동차를 생산했으나 76년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 신화'를 이룩해내고 86년에는 엑셀을 이끌고 자동차 본고장인 미국시장에 상륙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나의 생리"라는 자평은 '카리스마 경영' 그 자체로 불린다.

중후장대형 사업에서 성공한 후 83년에는 현대전자를 설립해 해외수출 위주로 세계적인 반도체 업체로 키웠고 80년 초에는 서해안 지도를 바꾸는 4천700만평 규모의 간척사업에 착수, 서산농장을 만들었다. 서울올림픽 추진위원장으로 88올림픽 유치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고 89년1월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데 이어 팔순을 넘어선 나이에도 98년 2차례에 걸쳐 통일소 500마리와 501마리를 몰고 방북, 금강산 관광뿐만 아니라 서해안공단 사업 등의 경협사업을 가시화시켰다92년 대통령 선거 때 국민당을 창당, 대권에 도전했다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락해 가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제조업에 대한 집착이 현대를 위기로 몰고 갔다는 일각의 비판도 듣고 무모한 경영이라는 질책도 받았다.

기업인으로서의 마지막 날인 2000년 5월 31일. 그는 42년간 살던 서울 청운동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반세기가 넘는 경영일선에서 동반퇴진할 것을 결심했다. 이날 기업인 정주영이 마지막으로 사인한 서류는 '3부자 동반 퇴진'. 그를 현대맨과한국 기업인들에게 '영원한 왕회장'으로 기억되게 하는 마지막 결단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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