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도덕의 정치와 산술의 정치

필자는 최근에 '바츨라프 하벨의 역사참여'란 부제를 가진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란 저서를 중심으로 한 집담회(集談會)에 참석한 바 있다. 체코공화국의 현 대통령인 바츨라프 하벨은 극작가로서 공산주의체제하에서 전개한 반체제 지성인으로서의 고난의 역정을 서술한 뒤, 그가 1989년 이른바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혁명을 성공적으로 주도하고, 1990년 이후에는 민주화된 국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으로서 현실정치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는 그의 높은 도덕적 이상을 내버리기는커녕 이들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정치의 장에서도 구현시키려는 '철인왕'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의 가치는 집담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휴머니즘에 기초한 정치

그러나 저자인 박영신 교수도 참석한 이 집담회의 주요한 관심은 '77 헌장'의 선포로 대표되는 공산치하에서 벌인 반정부운동이나 벨벳혁명 이후 국민의 여망을 업고 대통령으로 선출된 하벨의 정치적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날 집담회의 최대의 관심은 아무런 정치적 경험이 없는 반체제의 '지성인' 하벨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혼탁한 정치의 현장에서 그가 주장하는 '반정치의 정치'. 즉 거짓이 횡행하는 정치판에서도 정치의 술수를 배우라는 논리에 굴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정치'를 일관되게 구현하려는 용기에 집중되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의 요구를 저버리는 정치, 도덕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정치라고 비난하는 논리를 그는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를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실행함으로서 국내적으로는 살아있는 철인 정치가로, 국제적으로는 도덕정치의 전도사로서 체코공화국의 위상을 높이는 등 우리시대의 가장 걸출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부각되고 있다.

꼼수 판치는 현실

그러나 하벨의 도덕의 정치를 이야기하는 이날의 집담회는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우울한 정치적 상황의 전개로 말미암아 어두운 분위기에서 지속되었다. 특히 집담회의 시점이 박태준 총리가 물러나고, 이한동씨가 총리서리로 막 지명된 상황이라 얘기는 더욱 침울해 질 수밖에 없었다. 박씨의 사퇴가 부도덕과 맞물려 있고, 이씨의 총리지명이 4·13총선 이후 정계의 패권을 장악키 위한 엄밀한 계산에서 출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참석자들은 새삼 하벨과 체코공화국의 현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이책의 저자인 박 교수는 하벨의 정치사상이 어떠한 형태로건 우리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초판 중 수백부를 정치인들에게 배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한 행위는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칠 수 없었다는 술회를 들으며 씁쓰레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국민적 각성과 용기 필요

정치를 철저한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이러한 조작을 통해 권력을 획득·장악하겠다는 효율성 위주의 '산술의 정치'가 보편화된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산술의 정치가 한술 더 떠 '꼼수의 정치'로까지 타락한 우리의 정치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새삼 이 정치판의 변혁을 위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새 출발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유권자의 절반에 육박하는 국민이 정치를 외면하고 '기권'을 선택한 이번의 총선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같은 발상전환의 지렛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책임과 양심을 가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민을 철저히 수동적인 조작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 정치판을 정치가들로부터 되찾아 와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코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정신으로 거짓에 맞서는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각성은 우리가 바로 하벨의 '도덕의 정치'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고려대 교수·행정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