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쟁속의 대구 문화예술계-1)피란지 문학

1950년 여름, 대구에는 당시 이름있는 문인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검이 널브러지는 사지를 피해 정처없이 발길을 남으로 돌려 '문화의 도시' 대구로 밀려들었다.

50년대만 하더라도 문인들이 귀한 시대였다. 당시 대구에는 백기만 김성도 유치환 임영창 이효상 이윤수 이호우 이설주 박훈산 이응창 최광렬 등과 신동집 김진태 윤운강씨, 하양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시인 전상렬씨 등이 문단에 데뷔, 활동중이었다. 이들은 50년 7월 문총(文總)구국대 경북지대를 조직, 정훈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계몽과 선무, 위문과 종군활동을 폈다. 이런 중에 정비석 구상 박영준 박인환 장만영 최태응 등 많은 문인들이 대구로 찾아들면서 힘이 보태져 '전선시첩' 등에 작품을 발표하는 등 문학활동이 계속됐다.

해를 넘겨 51년 1·4후퇴 직후 대구에는 공군종군문인단(창공구락부)이 결성됐다. 중구 덕산동 공군홀에 사무실을 두고 종군 보고와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공군순보'를 내며 일간지에는 종군기를 게재하기도 했다. 불안한 전선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서로 교우하던 문인들은 5월 육군 종군작가단이 결성되면서 문학강연과 시낭송, 음악공연 등을 열고, '전선문학'을 창간해 움츠러든 창작열에 새로운 불씨를 지폈다. 당시 중구 서문로에 본부를 둔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대구 문인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아동문학가이자 수필가인 김진태씨가 유일하다.

이즈음 전화를 피해 대구에 발붙인 문인들은 향촌동 일대 단골 술집과 다방에 모여 막걸리와 커피잔을 기울이며 어울렸다. 시인 전상렬씨는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곳에는 아는 얼굴들이 어김없이 비치곤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문인들의 본거지가 된 식당으로는 '고바우' '향미' '백화' '곤도' '양자강' 등이 있고, '녹향' '백록' '돌체' '서라벌' '나포리' 다방에도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작고한 평론가 조연현선생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와 활동한 문인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알선으로 몇 개의 종군작가단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육군 종군작가단에는 정비석 구상 박영준 박인환 장만영 장덕조 최태응 조영암 김송 김진수 정운삼 김영수 김동진 등이 소속돼 있었다. 한편 공군 종군작가단에는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박두진 박목월 황순원 유주현씨가 참여했다고 한다.

대구에 온 타관 문인들은 그나마 종군작가단에 편입돼 최소한의 편의와 원조를 제공받아 형편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반면 부산으로 간 문인들은 '문총(文總)'을 중심으로 연결이 되어 소식을 주고받거나 서로 어울렸지만 난리탓에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시인 전봉래처럼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시인 박남수처럼 노점을 펴 생계를 꾸려간 문인들도 있었다고 조연현선생은 술회했다. -徐琮澈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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