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TV앞에서 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평양교예단의 교예를 시청하면서도 그랬었지만, 지난 6월13일에는 더욱 마음이 울렁거렸습니다.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영접하는 장면에서 우리 국민들이 받은 감동의 무게와 크기는 저와 비슷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정상의 만남이 예기치 않은 타종처럼, 55년이라는 긴 시간의 공명관을 울릴 때 아, 나에게도 그러한 떨판이 있었던가 싶게 내 마음은 울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더욱 감동스러웠던 것은 제 가족이 실향민이라는 것과 통일을 기다려온 세월의 장엄함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꿈을 그리면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인상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난 13일 두 정상이 뜨겁게 악수를 나누는 꿈같은 장면을 지켜보면서 제 마음의 떨판처럼 떨렸던 이유도 그 꿈의 육화 때문이 아닐는지요.
오랫동안 저는 저 자신을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로 인식했었습니다. 60년대 초에 행방불명된 아버지에 대한 풍문이 그랬었고, 갈수 없는 북녘땅에 대한 그리움을 끊임없이 듣고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이 그랬습니다. 우수 경칩 무렵이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맘 때믄 거저 대동강물 얼음풀리는 소리가 떠엉 떵 하디 왜"
그러면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였던 제 가슴에도 상상 속의 대동강이 해빙을 맞아 얼음 풀리는 소리가 쩡쩡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갈수 없는 나라에 대한 추체험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갈 수 없는 금강산, 원산 앞 바다에서 갓 잡았다는 청어의 기막힌 맛, 내 어머니가 열여섯에 시집갈 때 꽃가마0를 타고 울고 가셨다는 그 길, 그 추체험들은 제 속에서 한없이 많은 그리움을 만들었습니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왔다가 결국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었던 저희 일가족들은, 가슴에 고봉을 하나씩 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후에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상처는 저에게 고스란히 유전되었습니다. 백부님은 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주변은 많은 실향민들이 저희 집에 모여서 고향을 이야기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만, 그들의 꿈에 대해 삼팔선은 참으로 냉정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꿈의 육화를 기다리다 돌아가셨고 이제, 저희 어머니마저도 희망을 잃어갈 무렵, 해빙은 봄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오고야 마는 것처럼 왔습니다, 거짓말처럼 왔습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왔기 때문에 감동적이었고 그 감동이 이러한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몇년 전만 해도 어머니는 남북통일을 체념하신 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북이 통일 된대두 거기 가서야 살수 있갔니? 오마니래 살아 있갔니, 아바디래 살아 있갔니? 거서 한번 갔다 오는 거디"
그러나 오늘 아침, 강원도에 계시는 어머니의 전화는 오래된 희망 위에 새 가지가 돋는 것처럼 파랗게 돋아나는 희망의 빛이 보였습니다.
보고싶다. 내 막내동생, 그저 건강하게 살아만 있으면….
이번 남북 정상의 뜨거운 만남이, 우리들 가슴에 빙점을 영상으로 끌어올린 것처럼, 봄의 서곡이라면 얼마나 기쁠까요. 보이지 않는 상처, 보이지 않는 슬픔, 다 녹여 융융한 민족의 흐름의 발전이 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자란(시인.하양초등 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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