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서 꽃핀 우리 도자기문화-8)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武德)'라는 인물이 있다. 도고는 사쓰마 임란 도공 후손으로 다섯 살까지는 박무덕(朴武德)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쓰마의 조선 도공 후예라는 멍에 때문에 출세하기는 애초 글른 형편이었다.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은 고심 끝에 족보를 사들여 성(姓)을 도고로 바꾸고 사쓰마를 떠나 보낸다. 도고는 동경대학을 졸업한 후 외무고시를 통과하고 끝내 권력 최상부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책임자로 전범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50년 사망한다.

얼마전 일본사가들은 그가 1944년 4월 '한반도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를 해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혀 우익의 테러를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바로 그 도고의 슬픈 일생은 임란 도공 후손들이 갖는 원초적 아픔이다.

일본의 유명작가 시바 료타로는 20여년전 도고 시게노리를 취재하러 사쓰마로 와서 조선 도공의 후손들의 애환을 듣게 된다. 심수관의 집은 도고가 태어난 집 이웃에 있다. 시바 료타로는 곧바로 14대 심수관과 인터뷰 하고 임란 도공의 비애를 그린 '고향을 잊을 수 없다(故鄕忘く難じ候)'란 책을 쓰게 된다.

흔히 국내에서 '고향난망'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임란 도공들의 애환과 정착과정을 실감나게 그려 일본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심수관 집은 미야마 마을 중간쯤 간선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대문 정면에는 제주도 돌하르방이 반갑게 맞아주어 한국인 방문객들에게 긴장감을 풀어준다. 14대 심수관이 1989년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로 임명된 만큼 돌하르방 양옆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다원(茶苑) 분위기를 한껏 살린 정원을 지나 사무실로 가서 도착을 알린다.

안채에서 나온 15대 심수관이 응접실로 들기를 권한다. 건장한 체구의 15대 심수관은 한국 이천에서 옹기제작을 6개월 정도 배웠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섬세한 도예가 이미지 보다 선이 굵은 옹기장이 같이 걸걸하다.

"도쿄에서 갔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난 1월15일자로 습명(襲名)을 받았습니다. 보통 선대가 돌아가시고 습명을 받지만 제 같은 경우는 특이하죠. 그래서 이번에 습명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일 때문에 갔었습니다"

일본에서 도예가의 습명전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다.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도 되지만 앞으로 어떤류의 도자기를 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에 자연 관심거리가 된다.

"선조들은 '흑물(黑物)'이란 흑유(黑釉)계통의 도자기를 주로 해왔고 100여년 전부터 백자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 어떤 그릇을 주로 할 계획입니까"솔직히 습명전을 열지만 많은 작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굳이 어떤 류의 도자기를 할 것이란 것은 아직 미지수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의 조상들은 400년동안 여러 가지 기술들을 흡수하여 다양한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여러 가지 기술을 모두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나에게는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선조들이 축적한 기술 위에 나의 개성을 가미한 작품을 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나는 한국의 옹기단지, 장독에 깊은 매력을 느낍니다. 그것은 수백년을 민족과 같이 해오면서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그릇입니다. 한국인의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는 퍼팩트죠. 때문에 나의 작품에 그런 이미지가 반영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일본 백자에 옹기 이미지가 덧씌워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15대 심수관의 말마따나 일본은 츠케모노(장아찌)가 발달한 반면 한반도에서는 김치문화가 발달했다. 그 한반도의 색을 어떻게 장아찌 문화에 용해 시켜 쓰임새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내느냐는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심수관 선조들의 작품 수장실에 전시된 작품들에서 장독의 이미지는 어떤 곳에서도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없다. 전형적인 일본 백자가 주류인 작품들은 절로 탄성이 터질 만큼 정교하고 비례나 균형에서 '완벽'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13대가 만든 수많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흙으로 빚어졌을까 싶을 정도로 매끈하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에서 인간미는 느낄 수 없다. 땀이 밴 체취는 간곳없고 차라리 마네킹에서나 풍겨지는 조각미만 있을 따름이다.

작품들 앞에서 한발 물러나 내고향집 장독대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켜본다. 봉숭아 몇 포기가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고추잠자리가 가끔씩 내려앉아 날개 쉼하며, 한겨울 하얀 눈을 소복 소복 이고 있는 장독대의 아름다움. 15대 심수관은 털끝만큼의 오차도 허용치않는 비례와 균형미 숨막에 진저리가 난 것은 아닐까. 갈수록 팍팍해지는 세상에의 반발로 인간 냄새가 밴 그릇을 만들고자 작심한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땅에 발딛고 있는 우리는 장독대가 보여주는 '휴먼'이라는 수천년 된 보물을 못보고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imaeil.co---15대 심수관 오사코 가즈키

-사쓰마 야키 종주로서 한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끌어 나갈 계획인가.

▲우리 집안은 이천과 도자교류를 활발히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천전통도자조합과 연계를 맺고 매년 교류전도 열고 있죠. 금년에는 나의 작품을 이천으로 가져가 구워 2001년 이천 국제도자엑스포에 선물할 계획입니다.

-한국 도자기 발전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

▲어디까지나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한국 도예가들에게는 참 좋은 기술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전국에 흩어져있는 도예가들의 뛰어난 기술을 한 곳에 모아 체계화할 수 있는 도자기 연구 기초 기관의 설립이 무엇보다 급합니다. 다시말해 한국에서는 도자기 기술에 관한한 모두 '선생님'(기존의 도예가를 뜻함)에 의존해서 전수 받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입문부터 도자기를 감(感)에 의존해서 만들기보다 '가마에서 흙은 어떻게 수축하는가' '유약은 어떻게 만드는가' 등의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어프로치가 중요합니다. 바로 기초 연구기관에서 체계화 시키고 보급해야 할 일들이지요.

-일본의 각종 도자기 이벤트에 비춰볼 때 이천 도자엑스포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번 도자엑스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행사를 계기로 도자기의 디자인, 포장, 수출 문제 등을 더욱 심도 깊게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사를 단순한 판매행사 정도로 생각하여 푹죽을 터트리듯 일과성 행사로 끝낸다면 한국은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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