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쟁속의 대구 문화예술계(3)

"참으로 감격적입니다. 이번 광복절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다니. 기회가 되면 두고 온 고향의 친지들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산가족 상봉 등 주목할 만한 합의를 이끌어낸 지난 15일,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원로화가 신석필씨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잠시 회상에 잠긴 듯한 눈빛의 그는 5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전란 속의 그 시절을 더듬는듯 했다.

화가를 꿈꾸던 그는 고향을 떠나 평양국립미술학교를 다니다 월남했다. 남과 북으로 나뉘고 그 갈등이 처참한 동족상잔으로 터져나온 6·25전쟁. 고향을 등진 그는 9·28 수복후 피난생활을 하던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다 대구 부근에서 타고 가던 차가 논바닥에 뒹구르자 교통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구에 눌러앉게 됐다고 했다.

그무렵 1951년의 1·4 후퇴로 전선에서 국군이 패퇴하자 남으로 향한 피난민 행렬에 섞인 미술 작가들도 하나둘 대구로,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대구에는 훗날 한국 화단의 전설적 존재로 꼽히게 되는 서양화가 이중섭을 비롯, 한국화가 이상범, 서예가 오세창, 서양화가 최영림, 신석필, 박성환, 윤중식, 조병덕, 전선택, 유경채, 박항섭, 조각가 차근호, 사진작가 문선호, 응용미술가 이순석, 이귀희, 동아일보 연재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 등이 있었다.

당시 대구에는 이 지역 출신인 정점식, 강우문, 서석규씨 등이 유망 청년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함경남도 흥남출신으로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서양화가 서창환씨의 경우는 일본대학 미술학부 졸업후 귀국했다가 토지개혁때 고향에서 추방돼 월남, 46년 영주농고 미술교사로 부임, 이후 대구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역시 일본에서 미술대학을 나온 전선택씨도 6·25이전인 46년에 자유를 찾아 월남, 50년부터 51년까지 군복무를 한뒤 대구에 정착해 있었다. 이들 이북과 서울지역 등에서 자유를 찾아, 그리고 전쟁의 공포를 피해 피난온 이들 작가들은 당시 대구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토박이 작가들과 함께 전란시절 중 1년여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당시 대부분 30대 이상이었던 이들 중 신석필·전선택씨 등 이북 출신 작가들은 '월남화가단'을 구성,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공군 종군화가단'에 소속돼 전장의 숨막히는 긴장과 비참함, 전쟁으로 얼룩진 산하 등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했다.

신씨는 "당시 종군 화가들이 강릉비행장으로 나갔을때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들로부터 351고지 전투의 참상을 전해듣고 전쟁의 비참함과 두려움으로 몸을 떨던 기억이 납니다"고 회고했다.

전란기 작가들은 캔버스와 물감 등 그림 재료들조차 변변찮았으나 붓을 꺾지는 않았다. 개인전은 매우 드물었으나 대구역 부근에 있던 당시 미국공보원에서 이따금 전람회가 열렸다. 내일을 모르는 암담한 시절이었지만 전람회장은 예술에 목말라하는 관람객들로 붐볐다. 전시장이 적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요즘 열리는 전시회보다 관람객들이 훨씬 많았다고 옛날을 돌아본 지역의 원로작가들은 그림은 팔리지 않았지만 관람객들이 많이 와 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고 말했다. -金知奭기자 jiseok@imae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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