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남북정상회담은 분단후 '남북공동선언'이라는 가시적 성과물을 도출한 데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시각을 뿌리째 바꿔 놓았다.
이른바 '김정일 쇼크', '김정일 신드롬'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북한지도자인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달라졌고 그동안 멀게만 느껴지고 막연했던 통일에 대한 느낌이나 열망도 구체화되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순안공항 상봉장면은 대립과 갈등의 55년 분단사속에 구조화된 냉전적 사고의 틀을 깨부수는 출발이었다.
베일에 가려져 '폐쇄적이고 오만하고 충동적인 은둔의 지도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굳어져 있던 김위원장에 대한 인식은 TV 화면에 직접 등장한 모습을 통해 '진솔하고 유연하며 유머감각이 있는 지도자' '권력을 확고히 장악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 등으로 180도 뒤바뀌었다.
김찬기(34.회사원.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평양회담을 TV로 지켜보면서 그동안 교육이나 책 등을 통해 익혀온 김정일이나 북한에 대한 인식이 엄청난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김정일 따라하기' 현상까지도 곳곳에서 등장, 이번 평양회담 기간 단독.확대 정상회담, 오.만찬 등에서 보여준 김 위원장의 화술(話術)이나 말투도 주목받고있다.
청운 지도자 언어문화원 윤치영(44) 원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거친 듯하면서도 유머감각이 있는 말투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화법"이라며 "김 위원장의 화술을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강의용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이러한 평가나 현상은 과거에는 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혁명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흐름들이다.
또 '휘파람' '반갑습니다' 등 북한 노래는 방송매체와 학생들의 흥얼거림 속에서 자연스럽에 흘러나오고, 휴대폰 벨소리로 애용되는 인기곡이 되고 있고, 어린이들 사이에 김대통령을 맞은 북한 화동(花童)들이 보여준 북한소년단식 인사법도 유행되고 있다.
대학가에는 북한 바로알기 붐이 일고, 총학생회, 학과, 동아리 차원에서 너도나도 북한 교류를 추진하는 등 '북한 열풍'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북한노래 모음테이프를 제작, 이달 말부터 보급할 계획인 서울대 북한문제 연구동아리 '우리넘기' 회원 원상흥(25.컴퓨터공학과 4년)씨는 "남북정상회담 결과 남북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 분명하며 북한 동포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며 "북한노래가 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특히 사물에 대한 사고를 형성해 가는 초.중.고교의 학교현장에서 평양회담은 대립과 갈등의 분단구조에 터잡은 반공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교육체계에 일대변화를 강제하고 있다.
TV에 등장한 북한 지도자의 모습이 '뿔 달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우리 대통령과 다정히 악수하고 포옹하는 한민족 한핏줄로 부각된 점은 자라나는 학생들에큰 충격이고, 통일에 대한 무관심도 떨쳐버리게 하는 사건이 됐다.
서울 도봉구 창경초등학교 5학년 담임 윤을희(44.여) 교사는 "두 정상이 악수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뭉클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린 북한 어린이를 도와야 하고 함께 놀고싶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서울 혜화여고 안정숙(31.여) 교사는 "과거 북한얘기를 하면 별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 이제 눈을 반짝이고, 지리를 가르칠 때 휴전전 북쪽지역 지리.풍물에 흥미를 갖고 질문을 많이 하며, 경의선 철도 복원 등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정상회담의 후폭풍지대에는 보수단체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등도 '북괴' '북한 공산집단' 등의 용어를 '북한당국'으로 바꾸고 6.25 50주년 행사를 북한규탄 성격에서 평화.화해.협력 촉구성 행사로 바꾸게 했다.
이처럼 평양회담은 우리 사회 저변을 형성했던 반공(反共), 반북(反北) 이념, 정서를 흔드는 현상은 남북한 주민들의 거리를 좁히고, 쌍방간 정서적 유대를 강화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행동과 실천이 더욱 중시되는 남북관계에서 이미지만을 근거로 북한, 북한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환상으로 증폭되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비판적 신중론도 없지 않다.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전인영 교수는 "북한이란 실체는 항상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지나친 흥분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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