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쟁속의 대구 문화예술계(4)

1951년, 전란을 피해 대구에 모인 화가들은 암울한 시기였지만 열심히 현실을 헤쳐나갔다. 공군종군화가단은 '창공 구락부'를 결성, 전선에 나가 전장의 모습을 스케치하거나 사진으로 찍어 화폭에 옮겼다. 그 해 대구역 앞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당시 대구에서 활동중이던 시인 구 상씨와 아동문학가 마해송씨 등 문인들을 비롯, 많은 시민들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이에 앞서 화가 신석필씨는 대구로 오기전 잠시 피란살이했던 부산 시절에 관한 특별한 추억을 갖고 있다. 당시 미 국무성 문정관 브루노가 화가들을 위해 마련한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수상, 물감과 캔버스 등 미술 재료를 푸짐하게 부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싶어도 재료가 없어 쩔쩔매던 당시엔 무엇보다 반가운 선물이었다.당시 암울한 전란의 분위기 속에서도 화가들은 짬이 나면 약속이나 한듯 '아지트'가 된 곳으로 몰려갔다. 당시 번화가인 향촌동의 백록다방과 북성로의 가고파다방으로 가거나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날 때면 대구역 부근의 감나무집과 현재 미8군 자리에 있던 석류나무집으로 하나 둘 찾아들었다·백록다방은 시인 박목월이 자주 드나들어 그의 시에도 등장하는 다방이며, 가고파다방에는 작곡가 김동진과 윤이상 등이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화가 정점식씨는 "당시 가고파다방과 백록다방의 주인들은 지성미가 넘치는 여성들이었습니다. 갈 곳이 마땅찮던 시절, 피난지의 예술인들은 인텔리 여성들이 편안하게 분위기를 만든 다방으로 모여들어 정보를 나누거나 말 상대를 찾았었지요"라고 회고했다.

감나무집과 석류나무집은 막걸리 맛이 일품이었다. 큰 사발 가득 부어 담은 막걸리는 쌀로 만들어 맛이 좋은건 물론이고 공복도 어느 정도 해결해 줘 배고픈 시절의 술로는 제격이었다. 화가들은 막걸리 한 잔에 김치 한조각, 소금 몇알의 안주로도 아주 만족한 상태가 되어 전란의 고달픔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 무렵 대구와 왜관 등지에서 피난시절을 보내던 화가 이중섭은 지독한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인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에 보낸 뒤 여권과 여비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일본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는 우울증에 빠지게 됐다. 여리고 착한 심성의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목욕시켜주는 등으로 그리움을 달랬으나 결국 현재의 대구 종로 자리에 있던 성가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그는 식사마저 거부, 죽을 억지로 떠먹여야만 했으며 이는 그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바우 영감'의 만화가 김성환은 경기중 재학중 대구로 피난와 중구 계산동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같은 동네에 살던 정점식씨와 마주칠때 마다 파일을 옆에 낀 채 활기찬 목소리로 30대 중반의 정씨를 향해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는 등 예절바른 청년이었다.

한국화가 이상범은 당시 가족과 함께 대구로 와 현재 대구백화점 부근의 집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편이어서 다른 동료들에게 술을 자주 샀으며 작은 체구이지만 위트가 있어 인기가 많았다. 그는 특히 소설가 김팔봉과 친해 자주 어울렸다.

1년여간 함께 어울리던 피난지의 화가들은 해가 바뀐 52년 전란이 잦아들면서 하나 둘씩 서울로 되돌아갔다.

-金知奭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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