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진국선 약사 대체조제 인정

의사들을 집단 폐파업으로 몰아 넣은 의권(醫權) 쟁취. 국민들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의권'의 실체는 무엇일까?

의료계는 정부가 '의사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정상적인 수가 체계나 통제 일변도의 정부 정책 때문에 의사의 권리, 즉 진료권이 훼손됐고 자존심도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의약품 재분류, 대체·임의 조제 금지 등도 진료권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료계의 주장에는 합리적인 것도 있지만 허점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의약 분업을 시행하고 있는 선진국 사정과 비교해 보자.

프랑스 환자가 전액 부담

◇전문의약품 분류

집단 행동의 요구 중 하나는 의약품 재분류. 소비자가 의사 처방전 없이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 비율을 줄이고, 의사 '허가'가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전문의약품' 비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라는 요구이다. 약을 밥 보다 더 좋아한다는 우리 사회의 고질을 고치자는 측면에서도 일리 있는 주장.

그러나 완전한 의약분업이 이뤄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지금 우리나라 의사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사정이 다르다. 처방약(전문의약품)과 비처방약(일반의약품)의 분류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맡겨져 있다. 신약 특허기간이 끝나 선점 효과가 줄면, 해당 제약회사가 나서서 처방약을 비처방약으로 전환해 주도록 식품의약국(FDA)에 신청한다. 허용 기준은 부작용 여부와 자기진단의 용이성 정도프랑스에서는 가격 정책으로 일반의약품 남용을 방지하고 있다. 소비자가 약국에서 살 수 있도록 허용된 일반의약품 값은 전액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 반면 의사 처방약은 100% 의료보험에서 값을 부담한다. 때문에 약국 수입의 대부분은 처방전에 의한 조제 약값이 차지한다. 약사가 일반의약품 판매로는 수입을 올리기 힘들게 돼 있는 것이다.

계명대 조병희 교수(의료사회학)는 "우리도 의약분업을 하면 약사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항생제 처방을 임의로 할 수 없게 된다"며, 이것만으로도 처방권 확보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일 의사 주장처럼 전문의약품 비율을 지금의 60% 수준에서 80%로 높인다면 환자들이 그 만큼 병의원에 자주 가야 하게 되고, 그런 만큼 경제적 부담 증가와 과도한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가서 보험처리 안해줘

◇임의조제

의사들은 현재 법규로는 의사의 처방이 없어도 약사는 약을 조제해 팔 수 있도록 돼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의사의 진료권 독점은 심하게 훼손되는 것이고, 따라서 재고돼야 마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들이 염려하는 임의조제 방법 중 하나가 '혼합판매'이다. 약사 마음대로 팔 수 있는 낱종류의 일반의약품을 여러가지 조합해 파는 것이 그것. 예를 들어 감기 환자가 오면 해열제와 기침약을 하나씩 섞어 파는 것이다. 물론 해열제나 기침약 중에서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 것도 있지만, 일반의약품으로도 이같이 조제가 가능하다는 것.

이에대해 약사들은 "있기 힘든 일"이라고 반박한다. 일반환자뿐 아니라 의사 역시 약국의 주요 고객이기 때문에 동네약국이 주변지역 의사들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기는 영업 전략상으로도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또 의사회나 시민단체 등에서도 사람을 파송해 함정 단속 등을 시도할 가능성 역시 있다. 약사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멍가게에 대해 해 오던 방식.

어쨌든 외국에서는 여기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있는 유럽이나 캐나다 등에서는 약사가 임의조제할 경우 국가가 보험처리를 해주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임의조제를 했다간 곧바로 폐업선고를 받는다. 적발되면 즉각 면허가 정지되거나, 약품에 따라서는 아예 취소되기도 한다.

보험사 복제품 사용 권장

◇대체조제

의사는 이 약을 쓰라고 했지만 약사는 "저 약이 성분은 같으면서도 약효는 마찬가지이니 그걸 쓰라"고 권할 수 있다. 이것을 대체 조제라 부른다. 의사들은 이 대체조제를 약사가 하려면 사전에 의사의 동의를 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선진국에서는 약사의 대체 조제권을 인정하고 있다. 동의권자도 의사가 아니라 환자이다. 우리 의사들의 주장과는 판이한 모습.

캐나다에서는 약사의 대체조제를 100% 허용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체조제가 권장되고 있기도 하다. 약효가 같은데도 값은 훨씬 싸다면 보험 재정에도 도움이 되니 만큼 정부나 보험회사는 복제품 사용을 권장한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 지난해 개정된 약사법에 따라, 고객의 동의 아래 약효 동등성이 확보된 값싼 약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日 의약분업률 31% 수준

◇임의분업 요구

최근 의료계 일부에서는 의약분업을 전면시행할 것이 아니라, 병원약을 먹을 것인지 약국약을 먹을 것인지 선택할 권리를 환자에게 주는 방안을 택하자고 주장한다. 환자가 병원약을 먹고 싶지 않아 할 때만 처방전을 따로 발행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이것은 소위 '임의분업' 방식이다. 이것을 한참 적용한 뒤 전면적 분업으로 넘어 가자는 주장이다.

이 방식은 일본이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분업의 본래 취지에서 본다면 이는 실패한 분업에 불과하다. 일본의 지금 의약 분업률은 31%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와 약사로 하여금 상호 견제케 함으로써 약품 남용을 막자는 취지가 거의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반장치 함께 마련돼야

◇의료 전달체계가 좌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의약분업이 그것만으로 왈가왈부 되고 있지만, 실제로 제대로 되려면 다른 장치까지 함께 구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럽·미국·캐나다 등이 갖고 있는 비결이 바로 확고한 의료 전달체계. 가벼운 질환자는 대학병원 같은 3차병원에 갈 수가 없도록 돼 있다. 이렇게 되면 입원할 정도 돼야 종합병원에 갈 것이고, 병원엔 당연히 외래환자용 조제실이 필요 없을 것이다. 통원환자 진료에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우리나라 종합병원과는 전혀 다르다.

그 대신 선진국에선 '홈닥터'로 불리는 가정의가 정립돼 있다. 가정의의 다른말은 곧 '동네병원'. 우리도 전달체계 같은 동반장치를 함께 마련해야 '동네병원'까지 살림으로써 의약분업을 제대로 뿌리 내릴 수 있게 할 것으로 보인다.

李鍾均기자thcar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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