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 전선-(6)영천 공방전

6사단 7연대 소대장으로 영천 서북방 무명고지에서 전투를 벌였던 김진원(71·대구시 북구 학정동)씨. 6·25 50주년을 이틀 앞둔 노병에겐 아직도 잊을 수없는 전쟁의 한 잔영이 남아있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20일경 오후, 그는 진지 교대를 위해 고지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마을 뒷산 둔덕 위로 올라서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풀숲에 주저 앉은채 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며 죽어가던 한 처녀.

선혈이 낭자한 흰 저고리, 두손으론 쏟아져 내린 창자를 치마 폭에 받아쥐고 있었다. 지뢰를 밟은 것이었다. "처절한 격전을 숱하게 치렀지만, 이름모를 그 처녀의 참혹한 최후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리따운 시골 처녀의 삶을 산산이 찢어버린 전쟁. 무덥던 그해 여름도 기울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9월 총공세와 더불어 영천은 뜨거운 포연에 휩싸였다. 다부동 전선의 인민군 정예 15사단이 돌연 영천 북방에 나타나 8사단과 합세하면서 국군 8사단을 거세게 압박해왔다.

당시의 상황을 육군 참모총장이던 정일권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10여대의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6일 새벽 영천을 함락시켰다. 다급한 전황은 대구에 알려지고, 육본 상황실에는 인민군 탱크부대 출현을 알리는 보고가 잇따랐다.

탱크가 필요했다. 그러면 장병들의 사기가 회복될 것 같았다. 애가 탄 유재흥 2군단장은 왜관 전선의 미제1기병사단을 급히 찾아 탱크지원을 요청했고, 나는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단 1대라도 좋으니 탱크를 보내줄 것을 거듭 간청했다…'영천 함락. 낙동강 전선 최대의 위기. 국군 수뇌부가 풍전등화와 같던 반쪽 나라의 운명을 미군 탱크에 구걸(?)하고 있는 동안, 곳곳의 방어선이 계속 무너졌다. 다부동 전선이 뚫리면서 인민군의 포위망이 대구 동북쪽 10여km까지 압축됐고, 대구에 있던 국방부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전황이 불리하자 미8군도 낙동강 전선과 대구를 포기하고 데이비슨선으로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데이비슨 선(線)'은 마산~밀양~울산을 포함하는 방어선으로 미8군 공병참모 데이비슨(Garrison Davidson) 준장의 이름을 따 붙인 것. 미군과 유엔군이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한 예비진지였다.

더이상의 후퇴는 곧 전쟁의 포기였다. 위기감이 고조된 부산에서는 일부 인사들이 어선으로 해상탈출을 시도했고, 한국정부가 제주도로 천도해 제2의 대만이 될 것이라는 억측까지 나돌았다.

전황이 이정도였으니 막판 공방전이 치열하던 영천전선도 경황이 없는게 당연했다. 하루가 다른 전세의 변화로 전선에서는 피아의 구분조차 엇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9월 6일 위기에 처한 영천전선 지원을 위해 6사단 19연대가 8사단에 배속됐을 때이다. 부대 배치에 혼선이 생긴 연대장(김익렬 대령)은 인민군 1개 중대 병력이 호를 파고 있는 적진에 야간 시찰을 나가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마침 인민군들도 김대령의 지프를 자기편 상관의 차량으로 오인하고 길까지 안내하는 것이었다. 운전병과 함께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온 그는 영천 서북쪽에 포진하고 있던 1대대를 찾아갔으나 그곳 역시 포위된 상태였다.

7일 새벽 적지를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던 김대령과 1대대는 때마침 영천으로 이동해 오던 인민군 15사단의 보급차량 150여대를 기습해 불태우는 대전과를 올렸다. 전화위복이었다.

9월 5일부터 9일간 지속된 영천전투는 한국전쟁의 큰 전환점을 이룬 '대회전'으로 기록된다. 영천이 돌파되면 국군 1군단(8사단·수도사단)과 2군단(1사단·6사단)이 분리되고, 포항과 대구를 잇는 유일한 병참선이 차단될 처지였다. 그것은 곧 낙동강 방어선 자체의 붕괴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금호강변의 8사단 CP(현재 영남대영천병원 부근)를 찾아 전선을 둘러본 것도 이무렵이다.

그러나 당시 인민군의 공세도 늦여름 더위처럼 뒷심이 빠진 상태였다. 영천에 진출한 인민군 전차는 연료가 없어 기동이 불편한 상태였고, 일단 돌파에 성공한 병력도 증원부대와 보급이 끊겨 국군에 각개 격파당하는 형편이었다. 영천전투가 종결된 것은 13일 오후 1시경. 여기서 3천700여명의 인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8사단 공병대대 학도병이었던 이임룡(李任龍·67·경주시 노서동)씨는 "영천을 마지막으로 탈환했을 때 폐허가 된 시가지에는 인민군과 국군의 시체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차마 고개 돌릴 곳이 없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추석을 맞은 가을, 하늘은 그래도 높고 푸르기만 했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