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조광조는 유학과 왕도정치로 중국의 '요순시대'를 조선조에 실현하려다 결국 그가 개혁대상으로 꼽았던 훈구세력에 의해 거꾸로 37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조광조의 이른바 개혁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훗날 율곡은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예리하게 분석해 놓고 있다. '조광조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으나 학문이 채 이루어 지기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도 시정못하고 아래로는 훈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했다'며 '이를 후세에 경계한다'고 적고 있다. 말하자면 조광조가 강조해온 군자의 덕목인 '수신(修身)'이 덜 되고 경륜이 짧은 상태에서 너무 과격한 급진개혁을 추진하다 결국 노회한 훈구세력의 계략에 말려 되레 퇴출됐다고 부연할 수 있다.

그가 사약을 받고 숨진 전남 화순의 유배지 비문에서 송시열은 '주초위왕(走肖爲王)에 속은 중종이 어리석어서 똑똑한 인재를 잃었다'고 적고 있다. 조광조는 학문과 수양으로 성인(聖人)경지에 이른자를 '군자'라 했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모두 '소인'으로 몰아 배척대상으로 삼는 흑백논리의 소유자였다. 이게 바로 스스로 몰락한 원인이 됐음은 지금도 새겨봐야할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국민의 정부'가 지향하는 개혁정책들이 과연 모두 다 옳은 것인지는 훗날의 평가도 있을수 있으나 지금 당장에도 다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개혁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남북정상회담이후의 현 국내정세도 마찬가지다. 지금 만약 '통일이 민족의 숙원이나 지금으로선 문제가 있다'고 했다간 대역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분위기'는 분명 잘못됐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통일문제는 다양한 국민의 소리를 수렴, 그 '최대 공약수'를 도출해 내는게 실패를 줄이는 방법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추세는 6·25전쟁기념행사까지도 눈치를 봐야할 만큼 반대논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게 현실아닌가.

이 연장선상에서 의료개혁도 마찬가지다. 희생이 너무 따르고 무리가 있고 게다가 정부대책도 미흡하면 차선책을 찾는 상식아닌가. 문제는 만약 이걸 미루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극단적인 이분법(二分法)은 정말 무슨 재앙을 초래할지도 모를 위험천만의 발상이다.

박창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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