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길 나의 삶-조성진씨

마임연기자 조성진(趙誠振·43)씨는 500원을 주고 샀다는 남방을 입고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머리엔 10만원은 족히 넘을 '파울로 구찌'모자를 얹은 채로(그는 머리숱이 좀 엉성하다). 남이 입다 내다버린 '중고 남방'과 '파울로 구찌 모자'.

그는 우리나라의 '모자문화'를 말했다. 모자문화가 없으니 벼룩시장에서 단돈 몇백원에 구할 수 있는 옷과는 달리 비싼 값을 치러야 좋은 모자를 구할 수 있다고.조성진씨는 옷차림에 문화개념까지 도입, 멋지게 해석을 달만큼 '말솜씨'가 능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말없는 연극'을 하는 사람. '언어없는 예술'을 외치는 달변의 마임연기자다.

'마임(mime)'. 원래는 그리스 제사의식에서 몸으로 메시지를 표현했던 사람들을 일컫지만 근대 들어와서는 몸짓 연극을 뜻하는 말로 정착됐다. 우리나라에선 황무지와 같았던 '마임'의 세계를 그는 벌써 스무해가 넘도록 지켜오고 있다.

"대학(연세대 신학과) 2학년때 제3세계 연극제를 봤어요. 말이 아닌 신체언어에 중점을 둔 연극들이었죠. 말은 감동을 통해 자연스러운 교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려는 일방적 방식을 씁니다. 예술이 생활속에서 멀어진 것도 결국 몸짓 표현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말없는 연극인만큼 분장과 행동이 중요하다. 얼굴 전체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새하얗게 분을 바르고 때로는 어릿광대같은 차림으로 무대에 선다.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뒤뚱뒤뚱 걷기도 한다. 우스꽝스러운 한편으로 찰리 채플린의 '웃음 뒤 눈물 한 방울'이 떠오르는건 왜일까.

피에로를 연상시키는 그의 '예술인생'은 고교시절부터 시작됐다. 합창단, 중창단, 봉사클럽 등.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딴따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의과대학을 희망했지만 명함도 못내밀 성적. 커트라인에 맞춰 신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그의 연극인생은 돛을 달았다. 학과내 종교극회 회장에다 마당극 놀이패활동도 했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현실을 꿰뚫어내는 주제를 피할 수 없었다. 대학내내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다.

"80년 서울의 봄 때 학교내에서 철야농성을 하며 경찰과 대치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대규모 시위가 있을 때면 항상 극을 만들어 함께 참여했었죠. 그런 생활을 했지만 '다행히' 감방엔 안갔어요"

대학시절이 끝나갈 무렵, 그토록 연극을 반대하시던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다. 그는 부천YMCA간사를 거쳐 평택에서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4년여의 중소도시 생활. 좀 더 큰 공간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었다. 지난 89년, 당시 구미 순심여고 교장으로 있던 형님만 믿고 물설고 낯선 대구로 왔다.

대구 YMCA에서 간사로 일하면서 마임활동을 하던 그는 마침내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지난 90년 제1회 동성로축제 기획에 참여하면서부터 거리문화운동에 관심을 갖기시작했다. 지난 98년부터는 '축제문화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인 거리공연에 나섰다.

요즘도 매 달 한두차례씩 대구시내 국채보상기념공원, 교보생명 앞 광장 등에서 거리공연을 갖는다. 박시홍 재즈밴드, 조성진의 마임, 사물놀이패 랑과 풍물패 매구, 현대무용단 탄쯔, GMB와 미소래의 록 등. 종류는 그리 많지 않지만 바로 눈앞에서 '현장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개똥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기타를 꽤 잘 쳤는데 어른이 되고 난 뒤에는 기타를 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기타를 칠 무대도, 봐 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죠. 거리공연은 개똥이 아버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연기회를 주고 거리의 관객들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거리공연의 어려움은 한둘이 아니다. 월 수십만원씩 자비를 털어넣었다. 요즘은 '대구사랑운동본부'에서 월 50만원씩 보조금이 나오지만 여전히 돈가뭄이다. 애써 준비한 공연을 행인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쳐버릴 때도 힘이 쑥 빠진다. 그러나 설령 단 한명의 관객이 없다하더라도 그들의 공연은 이어진다. 사람이 안 볼 때도 거리의 건물들과 나무들과 새들이 듣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거리공연이 결국은 도시의 회색빛 얼굴표정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의 남다른 애착덕분일까, 최근들어 거리공연도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대구시가 지난 봄부터 국채보상기념공원, 달성공원, 경상감영공원 등을 공연·전시공간으로 활용하도록 배려한 것. 공원에서 공연하다 시끄럽다고 쫓겨난 기억이 있는 그로서는 큰 보람을 느낀다.

"장기적으로 거리공연도 유료화돼야 합니다. 프랑스는 거리공연자들에게 ID를 발급, 일정지역내에서 공연을 갖게 하고 입장료도 스스로 결정해서 받도록 합니다. 우리도 조례개정을 통해 거리공연을 뒷받침해줘야 해요"

그는 거리공연의 중요성을 도시의 경쟁력과 연결지어 생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을 앞둔 대구도 좋은 문화적 소프트웨어를 가져야 국제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는 논리.

조성진씨는 앞으로 거리공연에 아줌마들의 트로트 열창무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 더욱 친근하고 종합적인 무대를 만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내년 봄엔 대구에서 전국 거리공연 전문가들을 모아 축제형식의 '거리예술제'를 열 계획입니다. 축제문화연구소 힘만으로는 되지 않겠지요. 행정기관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불혹을 넘긴 나이, 그리고 아내와 열살배기 아들. "나이값 하라"는 비웃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땅의 대다수 40대들과는 '라벨이 다른 삶'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돈 되는 일도, 대중들의 관심이 쏠리는 일도 아니지만 제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훗날 제 아들이 이 길을 가겠다면 당연히 찬성하겠습니다" 마임연기자, 거리문화운동가, 왜관YMCA 사무총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조성진씨는 그의 다양한 이력이 말해주는것처럼 인생을 '축제처럼' 살고 있다.-崔敬喆기자 koala@imaeil.com---국채보상공원 등서 마임·재즈 공연

서너살짜리 꼬마들이 무대 사이를 제멋대로 헤집고 돌아다니지만 거리의 연주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한다. 일반 공연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축제문화연구소(소장 조성진)가 매월 한두차례 갖는 거리공연의 장점은 편안함과 자유로움이다. 억지로 끌어다놓은 관객도 아니요, 돈이 너무나 아쉬워 무대에 오른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거리공연이 좋아서 무대를 만들고 구경을 나온다.

장소는 국채보상공원 아니면 교보생명 앞. 축제문화연구소측에서는 반월당 삼성금융프라자 앞 등 다른 장소에도 욕심을 갖고 있지만 아직 허락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주말이나 일요일 오후가 거리공연 시간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때다. 마임, 재즈, 국악 등. 아직은 공연소재가 많지는 않다. 앞으로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이 숙제다.

축제문화연구소는 회원가입을 받고 있다. 회원들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거리에서 공연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때로는 모자가 돌기도 한다.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사례를 해달라는 얘기다. 지금까지 5, 6번 정도 모자가 돌았다. 하지만 모자 속의 돈은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가장 많은 액수가 모였을 때가 7만5천여원. 외국처럼 거리공연이 유료화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먼듯하다.

그러나 거리공연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보통 50∼60명, 많을 때는 100여명도 모인다. 축제문화연구소는 현재 도심 중심가 외에도 대학구내 등 장소의 한계를 넓힐 계획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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