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실시를 앞두고 의료계의 집단 폐파업이라는 전례없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해관계에 있는 의료계는 '실력행사'에 나서 의약분업 7월 실시를 저지하고 정치권으로부터 약사법 개정 약속을 얻어냈다. 약사회도 의약분업 정신이 훼손되는 방향으로 약사법이 개정될 경우 분업에 불참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있다.
의사측도 약사측도 모두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고 대외 명분을 내세우지만, 정작 의료 이용자인 국민의 목소리는 없다. 근대 의료 100여년만에 시작되는 의료 대개혁이 소비자가 주인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본다.
△정현수=의약분업은 향후 의료보험 제도 개선 등 의료개혁의 출발점입니다. 또 이번 파동은 그간 철저히 소외돼 왔던 의료 소비자인 국민의 알권리와 참여할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의약분업 준비 과정을 보면 주인이 돼야 할 국민은 철저히 소외돼 왔습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는 청문회 한번 열지 않고 방관만 했고, 정부의 정책은 이익집단의 힘에 밀려 오락가락 했습니다.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갖고 있는 의사에 대한 반감은 무척 큽니다.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지, 어떤 과정으로 치료되고 있는지 의사에게 한마디 물어보는 것 조차 쉽잖았습니다. 아예 무시해 버리는 대답이나 면박에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이, 마치 선생님 앞에 불려간 학생처럼 머뭇거려야 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진료 관행에 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송정흡=의료계에서 환자를 의료 소비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몇년 전 환자를 의료소비자라는 개념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면박당한 적도 있습니다. 의료계에서도 이제 인식의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는 점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의사의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제도적으로 그렇게 만드는 한계가 있는지도 살펴 봐야 개선책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의료수가 체계에서는 환자에게 상세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수가 때문에 하루 수백명의 환자를 봐야 하는 대학병원 교수가 어떻게 환자를 잡고 병증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동네의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수가가 더 인상돼야 합니다. 그것은 의료 소비자를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정=응급실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당해야 하는 고충도 엄청납니다. 한시가 촉박한데 해당 진료과의 전문의로부터 진료를 받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응급실은 왜 인턴 레지던트만 지켜야 합니까? 인턴은 레지던트를 부르고, 레지던트는 다시 스탭들을 호출하고… 환자 가족들은 혹시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것 아닌가 속이 탑니다. 허술한 응급체계도 의사에 대한 불신의 원인입니다.
△송=대학병원 응급실에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개선돼야 할 점도 많습니다. 국민들도 선진국 수준의 응급실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소비자들도 수가 문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응급의료 수가 아래서 응급실에 많은 전문의를 항시 배치하면 병원은 다 망합니다. 병원 경영자가 응급실에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응급의료비를 현실화 시켜야 합니다. 의사는 곤혹스럽습니다.
비응급 환자들의 응급실 이용도 응급실 기능 마비에 큰 몫을 합니다. 동네의원에서 치료 받아야 할 환자가 대학병원 응급실에 누워있으면, 진짜 치료가 필요한 응급환자에 대한 처치가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동네의원과 종합병원의 역할 분담, 즉 의료전달 체계의 확립이 시급합니다. 그동안 대형 의료기관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잘못된 의식 때문에 의료체계가 크게 왜곡돼 왔다고 합니다.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집중은 대형병원으로 하여금 본래 기능을 못하게 만든 한편, 동네의원이라는 또다른 의료 기반축을 위축시켰습니다. 국가적 손실입니다.
동네의원이 기능을 상실하면 장기적으로 소비자의 불편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주치의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동네의원과 동네약국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병력이나 약물투여 경력을 관리해 줄 수 있는 이들 기관을 이용함으로써 소비자들도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진단하는 의료관행이 정착돼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소비자들의 이런 행태의 밑바닥에는 더 큰 병원이 더 잘 할 것이라는 생각, 뒤집어 말하면 동네의원에 대한 불신도 깔려 있다는 점 역시 주목돼야 합니다. 물론 좋은 진료가 최첨단 장비와 시설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동네의원을 신뢰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할 것입니다.
△송=의료 선진국에서 동네의원은 치료 기관이라기 보다는 상담하는 곳입니다. 미국에서는 동네의원을 클리닉이라 부르지 않고 '오피스'라고 합니다. 환자가 오면 처방전을 적어 주거나 아니면 큰 병원에 입원시켜 줍니다. 환자는 동네의원을 통하지 않으면 보험 적용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동네의원을 이용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동네의원에서 환자를 대학병원에 보내고 대학병원에서 수술한 환자는 다시 동네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전달체계가 확립돼야 합니다. 또 동네의원 의사가 대학병원의 첨단 장비를 이용할 수 있어야 환자들이 동네의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야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습니다.
앞으로 의료전달 체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가 차등화 등으로도 이를 뒷받침 해줘야 할 것입니다.
△정=의료사고 처리 과정에서도 소비자 주권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실무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의뢰 들어온 의료분쟁을 단 한건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이 동료의사들의 오진에 대해 절대로 소견서를 써 주지 않더군요.
물론 대형병원에는 소비자 불만을 처리하는 상담 창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행정적인 문제만 다루지 의사의 의료행위 관련 사항은 접수하지 않습니다. 결국 환자 가족들은 물리력 행사로 내몰리게 되고, 극단적인 대결 양상으로 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의료분쟁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소비자의 권리와 의사의 권리를 동시에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꼭 마련돼야 합니다.
△송=무척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제가 속한 경북대병원의 경우 소비자에게 적정 의료 수준을 보장해 준다는 차원에서 그런 기구를 설치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의료사고에 관한 한 의사들도 피해자입니다. 의사의 과실이 아닌데도 가족들이 의료사고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의료진, 환자, 소비자단체가 참여하는 지역별 분쟁조정 위원회를 만들어 소비자와 의사가 진료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게 되면 의사와 환자의 상호 불신이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겁니다.
△정=합의점은 나오는 셈이군요. 한마디로 소비자가, 국민이 주인되는 의료개혁이 돼야 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개혁의 기본 원칙이 돼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도 제역할을 새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소비자의 대표라는 생각으로 개혁 방향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형성해 나갈 수 있어야 이익집단에 휘둘리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료 소비자인 국민들 역시 이 일을 남의 것이라 생각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원칙 위에서 실행 과정을 지켜 보고 참여해 나갑시다.
정리.이종균기자 healthcar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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