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몸'을 주제로 한 시(詩)가 부쩍 눈에 띄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문예지를 보면 이 주제가 담론의 한가운데 들어앉기도 하고,"몸시"라는 개성적인 시집을 낸 시인(정진규)도 있다.
이태 전에는 서울에서 '몸'을 주제로 한 '춤의 축제'가 열려 관심을 모았다. 무용은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인데 굳이 주제를 그렇게 잡은 까닭은 생명과 몸의 신비에 대한 추구 때문이었던가. 유럽에서도 '몸'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 모양이며, '몸 철학'이 등장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렇다면 이즈음 왜 새삼스럽게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일까. 이성(理性) 위주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고,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그 신비의 수수께끼가 쉽사리 풀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의 몸은 정교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비유되기도 한다. 3억 마리 정도의 정자가 1개의 난자와 결합해 인간의 생명체가 태어난다. 더구나 그 정자들은 각각 '화학무기를 장착하고 인공지능을 갖춘, 가공할 만한 0.006mm의 초현대식 미사일'이라는 표현도 나왔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신기하기만 하다.
인간의 몸을 작동시키는 기초물질들이 인류 역사 이래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그것을 벗겨 보려는 노력도 다각적으로 시도돼 왔다. 30억개의 이르는 게놈을 해독하려는 이른바 '게놈 프로젝트'가 1990년부터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생명공학의 획기적인 변화
이 분야의 연구가 근년 들어 급진전되는 가운데 전체 염기 서열의 90% 이상을 밝혀낸 초안이 최근 미국에서 공개됐다. 인체가 지니고 있는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생명공학의 새 지평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피부.키.얼굴.지능.언어 등 모든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총집합체이며 '생명체의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인간 게놈'에 대한 이같은 개가는 가히 혁명적이다. 유전자의 우열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신세계를 그린 미국 영화로 이태 전에 상영됐던 '가타카(Gattaca)' 속의 이야기가 바야흐로 공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게놈 지도에 대한 최종안은 2003년 쯤 발표될 예정이며, 실제로 적용되려면 적지 않은 세월이 요구되겠지만, 앞으로 이 지도가 완성된다면 생명공학의 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유전자 염기 서열의 규명은 인간이 태어날 때 결정되는 유전학적 숙명까지도 의도대로 바꿀 수 있는 토대를 가져다 줄 것이므로 암.당뇨병.알츠하이머병 등 불치병.난치병과 유전병 치료와 예방은 물론 운명으로 여겨왔던 생로병사(生老病死)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게놈 연구는 진단과 신약 개발에 이용하거나 그 자체를 데이터 베이스로 구축해 팔 수도 있게 돼 바이오산업이 차세대의 핵심산업으로 급격히 부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판도라의 상자'가 되리라는 예측도 있다. 이미 선진국들 사이에는 이 산업을 선점하기 위한 다국적 기업의 경쟁이 '소리 없는 전쟁'으로 가열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법적.윤리적 감시 강화해야
우리나라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올해 겨우 시작됐으며 뒤처져 있다. 정부.학계.기업이 공동으로 참여해 시스템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와는 차별화된 '틈새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형 포스트 게놈 연구를 위해선 시설 투자와 함께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해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가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바이오 벤처들을 적극 육성하는 방안이 필수적으로 따라야만 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벌써부터 걱정스럽고 우려되는 점들도 적지 않다. 이 연구가 오용되거나 남용된다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소수집단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고, 인체의 개조나 맞춤형 인간의 탄생도 가능해진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생명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지고, 인간의 본성마저 바뀌어지기가 예사일 것이다. 자연의 거역은 물론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넘나들게 됨으로써 가공할만한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다.
특히 소수 인종 집단에 대한 유전학 연구는 '인종적 공격' 가능성을 내포하므로 더 높은 생명 윤리가 전제돼야 한다. 게놈 지도의 완성에는 법적.윤리적.도덕적 감시의 강화가 반드시 병행돼야만 할 것이다.
포스트 게놈 시대. 과연 우리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인가, 더욱 불행해질 것인가. 벌써부터 두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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