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신문 창간 54주년-매일신문 소사

해방된 지 반년이 지난 1946년 3월1일 '남선경제신문'이 대구에서 창간됐다. 발행인 겸 사장에 우병진, 인쇄인 변영세로 당시 대화정(大和町) 74번지(현재 중구 대안동 74. 서문로파출소 자리)에서 창간의 돛을 올린 것. 당시 신문은 표시된 발행일자보다 하루 앞서 인쇄, 배포 되었으므로 2월말에 창간호가 나온셈이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2면. 구독료는 월 10원, 1부 40전이었다. 매일신문의 모태가 된 '남선경제'는 해방후 '신문난립시대'의 우여곡절을 딛고 47년 11월 회사 사옥을 중구 태평로 1가 8번지 도변빌딩 2층(전 평안외과 2층)으로 옮겼다.

'남선경제신문'은 전쟁중이던 50년 8월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종합일간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땀과 사랑으로 겨레의 빛이 되리'라는 사시를 내걸고 정도(正道) 언론으로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다. 같은 해 10월 천주교 대구교구유지재단이 신문사의 운영권을 인수했다.

55년 9월14일 자유당 정권의 잦은 학생 동원을 비판한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로 '대구매일'은 사옥이 피습되는 첫 수난을 겪었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어록을 만들어낸 이 필화 사건으로 당시 최석채 주필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이 사건으로 '대구매일'은 정도 언론으로서의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다.

사세가 신장되면서 58년 12월, 사옥을 태평로에서 남일동으로 옮겼다. 전국지로의 성장을 표방하며 제호도 '매일신문'으로 바꾸었다. 64년 8월 지방지로서는 유일하게 언론윤리악법 저지에 앞장서 끝내 목적을 관철했다. 65년에는 영덕간첩사건 기사사건으로 당시 안덕환 편집국을 비롯한 간부 3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야당성향의 매일신문에 대한 정부의 보복으로 인식됐던 이 사건은 69년 1·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검찰이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우리나라 언론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계기가 됐다.

80년 11월. 매일신문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조치로 당시 영남일보를 흡수, 통합했다. 현재의 계산동 사옥으로 이전한 것은 그후 1년이 지난 81년 11월이었다.

매일신문의 행보는 신사옥 준공후 더욱 빨라졌다. 83년 전국 일간지중 최초로 '매일 생활정보'라는 무료 자매지를 창간해 오늘날도 '주간 매일'로 제호를 바꿔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87년에는 포항과 안동, 구미에 3개 지역본부를 설치, 보다 지역민에 밀착된 시스템으로 운영하기 시작했고 대구 도심 반월당 등에 뉴스 전광판을 설치, 뉴스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91년 6월엔 전 지면에 대한 전산제작을 시작해 납활자 시대를 일찌감치 마감했다. 93년 9월 성서인쇄공장을 준공, 초고속 윤전시대를 열었다.

이에 앞서 90년에는 매일신문을 비롯 부산·강원·광주·대전일보 등 5개 전국 주요 지방언론사가 춘추사를 구성, 기사 교류·지역간 정보교류에 앞장서면서 지방화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 춘추사에는 현재 제주일보가 가세, 6개사로 늘었으며, 올 4월에는 중앙일보, 데이콤 등 국내 굴지의 미디어 관련 업체들과 잇따라 전략적 제휴를 체결해 전국망을 구성했다.

한편으로는 정보화 사업분야 진출을 위한 다각적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디지털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지난 95년 국내 지방지 가운데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m2000.co.kr)를 개설했던 매일신문은 금년 5월 e-메일 주소를 imaeil.com으로 변경하는 한편 1일에는 인터넷 정보통신분야를 이끌어갈 인터넷 종합회사 (주)클리오드를 설립해 정보화시대를 착실히 열고 있다.-鄭昌龍기자 jc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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