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의 모 여대 대학원에서 도자기를 전공하는 학생 15명이 방학을 이용해 아리타로 견학왔다. 학생들은 일본 천황궁에 납품하는 후쿠카와(深川)란 유명 요장(窯場)을 방문했다. 그들은 가마를 둘러보고 작업장에 들러 도자기 제작과정을 견학했다. 이때 요장측에선 한국서 온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물레작업을 해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안내를 맡은 요장 전무는 흙덩이를 물레 위에 올려두고 물레를 차보고 싶은 사람은 한번 차보도록 권했다. 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보더니 한 여학생에게 '네가 제일 잘 차니 한번 해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 여학생은 쭈삣쭈삣 물레 앞에 앉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물레를 찼지만 결국 그릇 하나 완성하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여학생들은 다시 자리를 옮겨 전시판매장으로 갔다. 그들은 현지인들도 선뜻 사기 힘든 15만엔, 20만엔 짜리 커피세트를 한명이 두세벌씩 싹쓸이 구입했다. 결국 커피세트는 바닥났고 구입하지 못한 물품은 귀국후 탁송하기로 하고 주문받을 지경이 되었다. 그들이 요장 견학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전무는 가이드에게 '정말 저 사람들이 대학원생들이 맞느냐' 묻고는 혀를 내두르더라는 것이다.
아리타 시내에는 사가현립 아리타요업대학이 있다. 2년제인 이 학교는 연구과정에 진학할 경우 2년간을 더 이수할 수 있다. 현에서 설립, 운영하는 곳으로 학장은 '도자기기능 인간국보'가 맡고 있으며 강사진은 전부 현업에 종사하는 중견·원로급 도예가들이다. 현재 재학생수는 140명으로 모두 앞으로 도자기에 평생을 바칠 인재들이다. 대부분 이들은 유명 요장의 2세들이거나 고등학교로부터 추천을 받아 입학한 우수한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철저한 실습 위주의 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곧바로 요장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기능을 익힌다. 이들이 만든 작품 하나하나는 일본 최고 도예가들의 빈틈없는 눈으로 평가를 받고 다시 다듬어진다.
요업대학을 찾아가는 날은 마침 졸업식 날이다. 지역의 모든 언론사에서 나와 취재를 하고 부현장(副縣長)이 참석해서 축사를 한다. 그들이 만든 정상급 작품들은 복도에 전시되어있다.
60명의 졸업생 가운데는 한국서 유학 온 여학생 3명도 있다. 졸업식장에서 특히 인상깊은 것은 60세를 넘긴 노인도 섞여있다는 것이다. 그는 20여년간 남의 요장에서 도안사로 일해왔는데 새롭게 자신의 가마를 하나 열고 싶어 이 대학에 진학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아리타에는 아리타관(有田館)이란 곳이 있다. 1996년 아리타의 불꽃박람회를 계기로 지역의 5대 요장이 총20억엔의 기금을 출연하여 만든 기념관이다. 이곳은 '대사(大蛇)전설'이란 전통인형극을 공연한다.
대사 전설은 이 곳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아리타 구로카미야마(黑髮山)이란 곳에 큰 뱀이 살았는데 성질이 포악해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해코지를 일삼았다. 어떤 해에도 마을사람들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제를 지냈는데 그때 무사(武士)가 나타나 뱀을 죽이고 처녀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인형극이래야 약 5분 정도에 걸쳐 하는데 이곳 아리타관이 그렇게 유명한 것은 여타 인형극과는 달리 주인공들을 모두 도자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극의 대사, 작동, 조명 등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대의 컴퓨터가 제어한다. 이 모든 시설들은 일본 도자기와 컴퓨터 산업의 현주소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일본 도자기는 더 이상 그릇 안에 갇혀 있지만은 않다. 전통이 있다면 전통 그 나름대로의 세계를 존중해주면서도 산업화란 또다른 얼굴로 끊임없이 변신한다.
세계 최고의 도자기 왕국 일본. 우리는 지금까지 임란 도공 6대가문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이 찬사를 듣게 되었는지 단편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임란 도공 6대 가문만이 아니라 이름없이 스러진 수많은 조선 도공들의 피와 땀을 걸러 모아졌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과거와는 상관없이 요업대학에서 보듯 '영원한 도자기 왕국'을 꿈꾸고 있다.
이제 눈을 우리에게로 돌려보자.
우리 도예가들은 풍부한 자원과 기술을 가지고도 수천년전의 '당초무늬'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또 우리는 식탁이 프라스틱, 유리, 심지어 스티로폼 따위로 점령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기도 하다. 도자기는 단지 도예가나 다인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치부해버리고 있다.
도예가들은 밥벌이 안된다고 푸념이고 주부들은 쓸만한 우리 그릇이 없다고 불평이다. 그렇다고 일본을 향해 흘러간 역사를 원망하고 우리의 기술과 인재를 되돌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시대가 과연 문화의 시대라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 과연 컴퓨터, 자동차, 유전자 등속 뿐일는지 한번쯤 되짚어 볼 일이다.
또하나 작은 바람 하나. 도자기가 일부 다인이나 '가진 자'들만의 고상한 취미가 아닌,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공예운동'으로 확산되길 기대해본다.
"더이상 찻잔속 도자기가 아닌 생활속 우리 도자기를 위해…"
-글·사진 전충진 기자 cjjeon@imaeil.com〈끝〉
---나가사키대 강사 유화준씨
일본 언론이 유화준 여사를 칭할 때면 꼭 앞에다 한일 민간문화교류의 교두보란 수식어를 잊지 않는다.
195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유 여사는 초대 후쿠오카 영사를 지낸 부친을 따라 열여덟살 나던 해 일본으로 건너온다. 72년에는 주일 한국대사관에 근무했으며 79년에 청산학원(靑山學院)대학을 졸업한다. 그후 그녀는 서울 88올림픽 때는 NHK국제국, 교도통신, 요미우리신문 등 리포터, 디렉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유 여사는 국제 문화관련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 유학을 각오하고 준비 작업을 하던 중 이 곳 아리타로 여행와서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된다. 그녀의 진로를 바꾼 것은 우연하게도 일본인들이 '우리의 대은인'이라고 적어 둔 이삼평 도공의 비문.유 여사는 이 한마디에 끌려 결국 일본내 흩어진 임란 도공의 흔적들을 찾아 나서게 되고 그 후손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에 이른다. 그 결과 대전엑스포 임란 도공 400년전 기획에 참여하는 등 임란 도공후손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게 된다. 임란 도공 후손들은 유 여사를 통해 역사 인식을 보다 명확히 하게 되었고 한국내에서의 각종 정보나 조사활동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 나가사키현립대학 강사직을 갖고 있는 유화준 여사는 '현해인구락부'란 한일 민간문화단체를 설립하고 일본 속에서 올바른 한국 심기에 주력하는 한편 고향 경남 진주와 정기문화교류전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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