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합데스크-혼돈시대

조선조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농경사회에서는 직종 변화요인이 거의 없었다. 전 국민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던 해방 당시의 직종수는 수백개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숫자가 70년대 초반에는 1천500여개로, 2000년 현재는 1만2천여개로 폭증했다.

이렇게 보면 해방 이후 55년 동안의 직종 변화량이 해방 이전 550년간의 수백-수천배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반세기 동안의 사회발전 속도가 그만큼 빨랐고 사회도 그만큼 복잡다단해졌다는 이야기다.

난마처럼 얽힌 2차 금융구조조정

세상이 발전하면 살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오히려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는게 속 편하다. 우리나라의 직종 변화를 보면 그런 윤곽을 읽을 수 있다. 50, 60년대의 인기직이던 교사는 70년대 이후 시들해졌고, 약사는 90년대 들어 급격히 하향곡선을 그었다. 93년 한약분쟁은 약사의 서민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0년의 의료계 폐업도 의사의 탈귀족층을 알리는 전주곡이 아닐까. 교수들 역시 90년대에 시작된 교수평가제를 시작으로 태평성대가 끝났다. 밥벌이 못하는 변호사가 아마 그 뒤를 잇게될 것이다.

인위적 조치가 없었는데도 인기직종이 한결 같이 나빠지거나 힘들어졌다. 이런 변화는 해방 이후 80%의 농민 중 68%가 도시로 빠져나오면서 생긴 선진화의 여파다. 선진화는 귀족직종을 평민직종으로 바꿔놓는다. 소수가 독점하던 사회적 과실이 여러 사람에게로 나눠지면서 특수층이 없어지는 것이다. 경쟁은 직종간이 아니라 직종내부에서 일어나게 된다. 선진화는 직종 유지비용도 키운다. 선진화 된만큼 높은 효율성, 생산성을 요구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선진화의 논리다.

선진화 논리 갖춰야

정부는 일전 노동계의 주40시간 근무안 수용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선진화의 논리로 보면 생산성 증가가 전제되지 않은 노동시간 감축은 무의미하다. 선진화에 걸맞은 대가, 즉 짧지만 고밀도.고생산인 노동이 바탕돼야 노동시간 감축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런 대책 없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기업이나 국가의 경쟁력 약화 곧 파산을 뜻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생산성 개선 없이 주20시간 근무를 한다면 그것은 노동복지가 아니라 불완전실업을 만드는 것이다. 주40시간 수용 검토라는 대통령의 언급은 이런 점에서 사려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더구나 우리는 아직 IMF의 그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최근 문제가 된 정부의 2차 금융개혁도 선진화 논리와는 거리가 없지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정부는 은행 부실을 스스로 키워놓고 국민 돈으로 부실을 막아주는 도덕불감증을 보여왔다. 이런 폐단이 고쳐지지 않는 한 금융선진화는 불가능하다. 설사 은행들이 열번 금융개혁을 하더라도 '적자생존'의 냉엄한 세계화 논리를 체득할 수 없다.

금융개혁은 정부가 먼저 내 손의 떡을 버리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관치금융의 단맛은 그대로 갖고 구조조정을 하려는 이중적 심보로는 시책기반을 구축할 수 없다. 금융노조가 반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은 정부가 저질러놓고 책임은 금융기업, 노동계에만 지우고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자세가 정부의 신뢰를 흔들어 모두가 제팔 제흔들기 식으로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혼돈의 근본이다. 먼저 내손의 떡을 버리자

선진화의 논리를 갖지 못한 정부의 시책은 이제 어떤 것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공권력을 앞세워 염치 없는 정부의 이익을 지켜려 한다면 혼란이 더 커질 뿐이다. 선진화에 걸맞은 정부의 솔선과 살신(殺身)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바탕 위에서 개인이기와 집단이기에 짓밟히고 뭉개진 공공의 이익을 차근차근 되찾아나가는 것이 현 시국의 해법이 아닐까 한다.

노동계 역시 선진화의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보여줘야 한다. 관치금융에 의해서든 그렇지 않든 금융기업이 국민에 입힌 손실은 막대하다. 그 책임의 일단이라도 떠안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불이익을 거부하기에는 금융기업의 부실이 너무 크지않나 싶다. 각계의 자기중심주의가 이 사회에 어떤 혼란을 가져오고 있는지를 당장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국가안보를 맡은 군인들이 파업을 벌인다 해도 돌을 던질 수 없는 세상- 국민만 이리 밀리고 저리 채이는 혼돈세태다.

박진용 중부본부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