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시스템 분야에서 국내 시장의 50%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비전. 통신 서비스.홈쇼핑 등 인터넷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다. 95년 대구에서 창립된 이 회사는 지난해 8월 서울로 옮겨갔다.
경북대 출신의 사장 한이식(36)씨의 얘기다. "지방업체라고 하면 낮춰 보지만 서울 업체라고 하면 한단계 위로 보는 우리 사회 문화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기술력을 갖고 있어도 대구에서는 자금을 모으기 힘들어 부득이한 선택을 했다".
어떻게든 지방에서도 벤처기업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모든 게 서울을 1등으로 쳐주는 현실의 벽을 결국 넘지 못했다는 고백이다.자금, 정보, 인력, 의사결정 구조 등 기업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가 집중돼 있는 서울에서 기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지방으로서는 서글픈 사례다.
기업인들은 대구에서는 신규 시장을 개척 할 수가 없다고 애로를 토로한다. 특히 A/S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의 경우 가장 큰 수요처인 수도권에서 떨어져 있으면 소비자들이 아예 상대를 안하려 한다.
대구에서 살아남는 기업이 없다. 대구를 대표하는 기업은 거의 무너졌다. 살아 있더라도 겨우 목숨만 연명하는 정도다. 지역 경제의 대명사 섬유산업. 갑을.동국.금강화섬.대하합섬. 시민들에게 이름께나 알려졌던 기업들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얼마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가공할 도산 사태가 휩쓸고 있는 것이다.
대구경제를 이끌었던 주택건설업. 전국의 주부들 사이에 한 때 청구.우방.보성 아파트는 최고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법정관리, 화의, 워크아웃 신세다.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황금주공아파트. 최근 재건축 사업이 활기를 띠지만 지역업체들은 명함도 못내민다.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인 이 단지의 시공권은 현대, LG, 대림, 대우 등 4대 건설업체가 따냈다. 4천500가구의 분양대금만 6천억원. 고스란히 서울로 올라간다.
IMF 이전만 해도 지역 지정업체들이 공사권을 따내기 위해 서울업체들과 당당히 경쟁했지만 이제는 하청이라도 맡겨 주면 감지덕지 할 판이다.
유통 분야는 이제 서울에서 내려온 대기업들의 각축장이 돼 버렸다. 지금까지 들어선 대기업 할인점이 4개. 내년까지 12개로 늘어난다. 홈플러스의 하루 매출은 7억5천만원. 부산 롯데 백화점을 제외하고는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인 대백프라자의 하루 매출은 12억원. 대백프라자와 매장 규모, 종업원 수 등을 감안하면 홈플러스의 매출은 경이적이다. 이 자금들도 서울로 간다.
결국 지역에 기반을 둔 유통업체들의 입지는 갈수록 서울업체들에게 밀려 좁아지는 상황이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쓸만한 업체는 상당수 옮겨가 버리고 대구는 생산시설 공동화(空洞化) 지역으로 전락하고 있다.
상시 종업원 200인 이상의 제조업체 변화 추이를 보자. 지난 90년과 98년을 기준으로 전국은 31.7% 감소했는데 비해 대구는 50.0% 줄어 들었다. 공장.사무자동화 등으로 종업원 수가 줄어드는 것을 감안해도 대구는 기업다운 기업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대구지역 상위 20대 기업의 매출 변화 추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연히 1인당 지역총생산(GRDP)이 6년 연속 전국 꼴찌일 수밖에 없다.
제일모직. 지난 96년까지 본사가 대구에 있다가 구미로 이전했다. 당시 이 업체의 매출액은 연간 7천억원. 1인당 부가가치 생산액은 8억7천만원이었다. 이 정도 되는 기업 10개만 있어도 대구가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기업체는 공장보다 본사가 있어야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대구에는 본사가 있는 중견.대기업들이 별로 없다. 있어도 이윤을 내는 업체들은 갈수록 감소하는 상태다.
대구지방국세청 관내에서 법인세를 내는 업체가 96년에는 1만1천164개사에 4천823억원이었으나 지난해는 업체 수는 1만3천662개사로 늘었지만 세액 자체는 4천610억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그만큼 기업의 영업환경이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그나마 본사가 지역에 있는 기업중 상당수는 사실상의 본사 기능이 서울에서 행해지고 있다. 실제 지역 건설업체의 대표는 일주일에 6일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금융 및 대정부.정치권 로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구에서 유일한 재벌 그룹 계열사인 삼성상용차. 96년 8월 창립 이후 줄곧 대구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대표이사 및 주요 임원은 서울에 상주한다. 현재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해외투자자본 유치도 서울에서 이뤄진다.
대구시는 몇년전부터 지역의 내로라하는 섬유업체들이 한결같이 운영하고 있는 서울본사를 대구로 이전하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성과는 별무다. 산학경영기술연구원 박종달 소장은 "우리의 기업 환경은 본사가 대구에 있어도 기업 오너는 서울에 상주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심각한 인력 부족 현상은 기업체의 성장 한계를 증명한다. 지역 모 유통업체의 경우 최근 대리이하 직원 20여명이 서울 부산 등 대형 유통업체로 한꺼번에 빠져 나갔다. 모두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알짜배기들. 기업들이 성장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회사 중견 간부 직원은 "열악한 임금 체계 및 앞이 안보이는 기업 환경에서 좋은 인재들이 빠져 나갈 수밖에 없고 이것이 경쟁력을 약화시키면서 기업의 수익성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추세라면 대구에서 살아날 기업은 구멍가게 수준밖에 더 있을까하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崔正岩 기자 jeong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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