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성로 밤거리 '10대 교복들의 천국'

12일 오후 8시30분. 대구시내 최고 번화가인 동성로에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교후 곧바로 시내로 나와 도심의 인파속 밤거리를 누비는 즐거움에 시간가는줄 모르는 이른바 고딩들. 상당수는 교복 치마를 무릎 위까지 한껏 치켜 올리고 머리 모양은 제각각이며 책가방은 납작 등에 붙은 차림이었다.

친구의 생일을 노래방에서 축하하기 위해 반친구 6명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는 ㄱ여고 이모(17)양은 "우리들이 자주 다니는 노래방이 있으며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어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고 말하며 까르르 웃었다.

ㄱ여상 박모(16)양은 "거의 매일 동성로에 나오는 학생들은 한반에 20%에 이르고 대부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하교길에 시내로 몰려나온다"고 말했다.

중학교때부터 밤마다 교복차림으로 동성로를 찾고 있다는 권모(18.ㄱ여상)양은 "밤거리를 교복을 입고 다니면 무언가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다.

지난 90년대 젊은이들이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중장년층이 '쫓겨난' 동성로는 어느덧 10대들, 그것도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밤거리를 메우는 풍경으로 바뀌고 있다.특히 여고생들이 밤마다 몰리는 것은 이 일대에 의류점들이 새로운 업종으로 등장하면서부터다. 여기에 중.고학생들을 고객으로 하는 액세서리점과 가요방 찻집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동성로는 학생들의 '해방구'로 급변했다.

동성로에서 30년간 가게를 운영한 문모(54)씨는 "대형의류점이 생긴 2, 3년전부터 교복을 입고 동성로에 나오는 여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는 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1년전 찻집에서 가요방으로 업종을 바꾼 김모(62)씨는 "예전에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차마시러 오는 것을 꺼렸지만 IMF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뜸해지면서 고등학생들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군에 갔다 온 박모(24)씨는 "제대하고 돌아와보니 밤거리는 여고생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밤 10시. 이 때가 되면 그나마 간혹 보이던 성인들은 오간데 없고 동성로는 10대들 천지로 변한다.

동성로에서 가까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네댓명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북한 가요 '휘파람'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김모(19)군은 "다른데서 춤춘다면 이상하게 쳐다보지만 여기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 애들이 자주 모인다"며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비슷한 시각 호프집.소주방.노래방 등 각종 업소들이 밀집해 있는 대구백화점 인근. 곳곳에서 짧은 머리를 노랗게, 빨갛게 염색한 10대 소녀들이 눈에 띈다. 앳된 모습이 한눈에 10대임을 알 수 있는 소녀 한 무리가 가까운 콜라텍으로 들어선다PC방에서 채팅에 열중하고 있던 박모(18)양은 "지금 교제상대를 찾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10대들이 동성로를 주로 찾는 것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만난 최모(17)양과 김모(18)양은 "마음껏 놀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곱지만은 않다.

회사원 정필찬(42.대구 북구 노원동)씨는 "우리가 70년대에 학교 다닐 땐 교복입고 밤에 시내에 나오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들었다"며 "요즘 애들을 볼 때 사실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관리사무소 한 관계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리는 일도 다반사"라며 "괜히 말리려 했다가는 욕먹기가 일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70, 80년대 샐러리맨들의 낭만과 애환이 서린 동성로는 어느새 10대들을 노리고 번뜩이는 상혼에 유혹당한 10대들의 '해방구'로 밤마다 깊어가고 있다.

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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