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3년 U대회 대구유치-개최 성사되기까지

'5년여에 걸친 여정은 끝나고 이제부터 본격 시작이다'250만 대구시민들에게 좌절과 실망, 깊은 후유증을 남겼던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IMF의 격량으로 좌초됐던 하계U대회의 꿈이 드디어 실현됐다. 정부지시로 한때 U대회유치를 포기하는 등 아픔을 겪었던 대구시. 재도전 끝에 유치에 성공해 국제적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하게 됐다. 일비(一悲)뒤 일희(一喜)의 기쁨이지만 그간의 U대회유치 과정은 우여곡절의 역사였다.

대구시의 하계 U대회 유치추진은 지난 95년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광주와 대전에서는 비엔날레와 엑스포개최로, 부산은 2002년 아시안게임 유치 등 국제적 행사로 지명도를 올리는데 반해 대구는 변변찮은 행사마저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매일신문사는 체육계의 여론을 전달하며 국제적 대규모 체육행사의 유치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고 대한체육회 박상하부회장도 간담회를 통해 이같은 필요성을 공식제기했다. 이로써 지역언론에서 U대회 유치 필요성이 처음으로 공론화되는 등 점차 체육계를 중심으로 국제대회 유치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등 여론화됐다. 그리고 95년 6·27선거에서 민선 대구시장으로 당선된 문희갑시장이 10월 지역발전과 화합등 침체된 분위기 쇄신을 위해 U대회의 필요성을 적극 제기하며 U대회 유치분위기는 급류를 탔다. 이과정에서 대구와 경북도가 U대회 유치를 둘러싸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다소간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구시 중심의 U대회 추진이 무게를 얻으면서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게 됐다. 이미 그 당시는 전국체전을 개최했던 광주와 대전이 일치감치 2001년 U대회의 유치를 선언하고 나선 상태였다.

뒤늦게 출발한 대구시는 범시민적으로 U대회 추진에 나섰다. 대구의 U대회 유치결정후 대구·경북의 주요기관단체장이 U대회유치 지지결의와 유치준비기획단설치·대구시의회 지지결의와 기금모금 등 범시민적인 U대회 유치열의가 이어졌다. 또한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에 대한 집중적인 설득작업으로 대구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700명이 넘는 지역인사들이 U대회 유치위원회에 참가하는 열성을 보였고 대회유치를 위한 분위기는 무르익어만 갔다.

그러나 지난 97년 대통령선거와 함께 들이닥친 IMF의 격랑은 이같은 대구시민들의 U대회 유치열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98년 김대중대통령 집권뒤 4월 대구에 들른 김대통령은 U대회유치 재검토 지시를 내렸고 중앙정부와 대구시와의 힘겨루기는 결국 대구시의 완패로 끝났다. 그해 8월 대구시는 3개월여에 걸친 중앙정부와의 밀고 당기는 신경전끝에 손을 들고 박병련부시장의 기자간담회를 통해 일방적인 유치포기를 선언했다. 그날 문시장은 해외시장개척단의 일원으로 외국으로 출국해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대회의 일방적 포기선언으로 문시장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뒤 수면하 잠잠하던 U대회 개최문제는 올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한체육회 김운용회장과 문시장과의 합의로 재추진됐다. 당시 이미 러시아 모스크바와 터키 이즈미르, 멕시코 몬테레이가 유치경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다급한 대구시는 부랴부랴 의향서를 먼저 제출하고 5월 정부승인을 받아 신청서를 보내고 곧이어 6월 과거 2001년 U대회유치위원으로 활동했던 인사등 19명으로 유치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한체육회 박상하 부회장을 위원장으로 삼아 총력전에 들어갔다.

대구시는 미처 필요한 예산확보도 안된 상태라 지난번 U대회 유치를 위해 모금해 두었다가 쓰고 남은 6억원의 기금을 쓰기로 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계속했다. 박위원장은 특히 특유의 마당발을 이용해 친분있는 임원들을 공략해 들어갔다. FISU본부가 있는 벨기에 등 유럽, 미국의 조지 킬리안회장, 대만과 멕시코의 집행위원을 잇따라 방문하는 등 막판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문시장을 비롯, 4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홍보단을 구성해 중국으로 파견한 대구시는 이들과 함께 FISU집행회의가 열리는 14일 오후까지 막바지 땀을 흘렸고 결국은 값진 결실을 거뒀다. 5년여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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