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가 움켜 쥐고 있는 것은 지갑뿐만 아니다. 지방에 이양해야 할 권한도 여전히 틀어쥔 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중순 충남 천안에서 열린 행자부 및 기획예산처 주최 정부개혁 포럼. 지자체 권한과 자율성 확대를 강도높게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이 곳에 참석한 한 지자체 장은 "지자체별로 차등을 둔 공무원 수를 인구와 행정수요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공무원 수를 비교해 보면 이 나라가 '서울 공화국'임을 실감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서울 성동구청과 대구 동구청은 인구 수나 행정 수요 등이 거의 비슷한 기초자치단체다. 그러나 공무원 수는 성동구청이 1천400여명으로 동구청 700여명의 곱절에 이르고 있다. 주민에 대한 행정서비스의 질이 극심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지방 행정 조직인 국.과 신설 및 폐지 등에 대한 자율성 확보도 지자체의 한결같은 주문이다. 지난 98년부터 시작된 공무원 구조조정도 중앙 위주의 일방적인 잣대로 진행, 지방의 행정수요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정원축소 서울은 예외
중앙부처가 조직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인사에 있어서의 지방 공무원의 설움도 적잖다. 공무원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한 정원 대비 20% 축소 방침은 지방엔 여지없이 적용되고 있지만 조직권을 가진 중앙부처는 이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높다. 경북도 한 공무원은 이 과정에서 중앙부처는 복수직급제를 통해 사실상 사무관이 서기관으로 승진하는 효과까지 거뒀다고 주장했다.
중앙에 대해 느끼는 열패감은 예산을 확보하거나 따내기 위해 기획예산처를 자주 드나드는 지방 예산 담당 공무원들이 누구보다 심하게 탄다.
"전국 지자체의 우리같은 예산 담당 공무원들이 자주 기획예산처로 문안을 가야한다. 그러나 실제로 되는 일은 없다. 기획예산처 직원이 '올 필요 없다'고 성가셔 하면서도 안 가면 오지 않는다고 또 씹는다"
그들이 전하는 낮은 목소리다.
대구시 한 간부 직원은 이와 관련,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면 행정 일선 현장이 강화돼야 하는데도 거꾸로 중앙이 강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월드컵 개최지로 수도인 도쿄가 아닌 지방을 택하고, 결승전도 요코하마에서 치르는 일본, 세계적 패션.섬유 도시인 밀라노가 대규모 전시시설을 보유하고도 국제 전시 행사는 인근 도시에 유치토록 하는 이탈리아 등의 지방 배려를 부러워 했다.
중앙 정부 권한의 지방 이양 문제는 95년 지방자치시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쟁점이 돼 왔지만 정부의 권한 이양은 소걸음인데다 핵심 권한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놔 주지 않고 있다.
지난 해 8월에야 국무총리실에다 '중앙권한 지방이양 추진위원회'가 발족돼 공식활동에 들어가 전문건설업 면허증 발급 등 총 123건의 지방이양'거리'를 의결해 둔 상태지만 법령 개정(1년 이내) 등이 이뤄지지 않아 완료된 것은 아직껏 아무 것도 없다. 이같은 흐름의 또 다른 한 켠에서는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교묘한 '기술적' 통제가 오히려 커지고 있다.
경북도 한 간부의 고백을 들어보자.
◈교묘해진 기술적 통제
"지난해 중앙정부가 우리 도에 실시한 평가는 종합평가든 부분평가든 60개가 넘는다. 한달에 3번 꼴 아닌가. 행정자치부의 지방자치단체 종합평가, 농림부의 농림사업 평가 따위 등이다. 평가 대상도 국가 위임사무와 지방고유 사무 구분 없이 무차별적이다. 평가란 것은 어떤 식으로든 감사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민선으로 도민들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단체장과 그 이하 직원들이 자연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얽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뿐인가. 올 초 감사원마저 지자체 감사를 위한 7국을 만들고 나서, 자치단체장이나 지자체 공무원들은 더더욱 중앙 위세에 숨죽여야 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같은 각종 평가에 매달려 행정력이 얼마만큼 낭비되고 있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 한 예로 주민들의 평가를 의식한 경북도는 지난해 34개 상을 타느라 적지 않은 행정적 공력과 비용을 들였다.
기술적 통제의 하나로 권한을 내려주고는 물먹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노동, 환경, 통계, 산림 등 관련 부서는 정부가 지자체마다 특별 관청을 마련해 두고 있어 사실상 중앙 보조 업무나 뒤치다꺼리 업무가 대다수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는 '들러리 부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청, 국토관리청, 농업관리원, 식품안전의약청 등이 소위 특별 관청이다.
예를 들면 농림부가 규격 출하제도를 시행하면서 이를 각 지자체에 맡겨 관련 예산을 넘겨주고 관리, 감독토록 위임할 수 있지만 자기 부처 산하 농업관리원이 이를 담당토록 해버리는 식이다.
◈분권화는 세계적 추세
이같은 상황이 전개되면서 과거 '부처 이기주의'라던 말은 이제 '행정계층 이기주의'라는 말로 대치됐다. 중앙부처, 광역, 기초 등으로 각 행정 계층이 자기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사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파이(pie) 가르기식의 '밥그릇' 싸움으로만 이해해서는 제대로 된 처방이 내려지기 어렵다.
합당한 중앙과 지방의 권한 재배분은, 지방화가 세계적 추세라는 거창한 말 차치하고라도 지자체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도 시급히 이뤄져야 할 당면과제이다. 거대한 공룡으로 변해가고 있는 서울과 수도권 위주 정책들로 빚어지는 부작용들을 극복하는 해법의 하나이다.
이에 따라 제 몫을 찾으려는 각 지자체들의 요구 사항도 커지고 있다. 지난 2월 기초자치단체들은 사단법인 전국기초자치단체장협의회를 발족해 목소리를 합일시키기 시작했다. 지난 해는 전국 시.도지사 협의회가 발족됐고, 영.호남 8개 시.도지사 모임도 만들어져 중앙정부에 대해 집단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11일 부산에서 열린 8개 시.도 기획관리실장 모임에서는 영.호남 8개 시.도지사로 구성되는 '영호남국토균형발전 추진협의회'와 기획관리실장들의 '실무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는 등 제몫 찾기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재와 같은 지방 무력(無力)의 상황이 개선없이 이어진다면 머잖아 자치단체의 단체 행동화 가능성을 배제키도 어렵다. 중앙을 향한 지방의 생존투쟁 같은 것 말이다.
裵洪珞기자 bhr@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