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구려 옛 땅을 가다-백암성과 석대자산성

돌들이 희다고 붙여진 백암(白巖)성. 일명 연주(燕州)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심양(審陽)에서 남쪽으로 60km쯤 떨어진 요녕성 동탑시에 우뚝 솟아 있다.

이 성은 고구려에 대한 기록과 실물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지고 성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백암성의 남쪽은 절벽. 그 밑으로는 태자하(太子河). 이 쪽으로는 적이 접근을 못한다. 나머지 3면은 굳건한 성벽. 전망대에 서면 1천400년전 치열했던 전투 장면이 선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도움으로 집권해 있던 서기 645년. 당태종이 수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계필하력을 선봉에 세워 이 성을 공격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60km쯤 떨어진 개모산성과 100km쯤 떨어진 신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 손대음(孫大音) 장군이 군사 2천600명, 백성 등 1만여명으로 결사 항전을 한다. 당의 대군이 공격해오기 수십차례. 인근 요동성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과부적을 절감, 손 장군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결국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당군은 안시성 싸움에서 일격을 당한다. 양만춘 장군의 눈부신 활약으로 당태종은 큰 부상을 당한 채 물러난다.

백암성은 이보다 앞서 551년에는 돌궐의 공격을 받았지만 쉽게 물리쳤다. 돌궐이 신성을 공격하다가 불가능하자 이곳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

전망대의 서남쪽 방향은 예맥족들이 살았던 장소. 지금도 당시의 무덤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제왕운기에는 남북 옥저, 남북 부여, 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기록돼 있다.

성으로 오르는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해 적의 침공에 대비, 높이가 10m에 이를 정도로 높고 튼튼하게 쌓았다. 이곳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성은 벽돌로 된 중국의 성과는 달리 모두 돌로 쌓았다. 적이 성을 무너뜨릴 신무기를 가져와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 이는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백암성은 치(雉)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곳. 치란 일정 부분의 성벽을 ㄷ자로 만들어 적을 삼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것. 북쪽면은 두개의 치를 중심으로 성벽이 높이 쌓여 있다.

계단식으로 들여쌓기를 한 부분은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었지만 그냥 쌓은 부분은 훼손이 심하다.

성벽에서 약 200m 떨어진 지점에서는 석회광산 채굴이 한창이다. 이 주위가 모두 석회석 광산이다. 성이 곧 망가질 것 같았다. 고구려의 유적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개발만 하면 된다는 중국의 속셈인 것 같았다.

마을 집들의 담과 밭의 경계석도 산성에서 옮겨온 돌들로 뒤덮혀 있다. 그만큼 파손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증거다. 금속탐지기를 갖고 와서 유물을 찾는 사례도 있단다. 북서쪽 성벽은 대형 중기로 무너뜨린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성벽까지 차도를 만들어 놓고 돌을 실어 나른다.

주민들은 한국에서 대대적으로 보수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언제쯤 개발할 것인지 물었다.

백암성이 드러난 상태에서 옛 모습을 간직해 왔다면 심양 동북쪽 40km 지점 기반산댐(棋盤山水庫) 위에 자리잡은 석대자산성은 땅 속에 묻혀 고구려의 역사를 간직해오다 최근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웅장한 석성이었다가 오랜 세월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에 묻히고 허물어지면서 산성의 모습은 없고 흐릿한 토성의 형태로만 수백년의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발굴된 것으로는 유일한 고구려의 성.

중국 정부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지난 98년 8월 성을 발굴하고 5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할 공간도 만들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곳에 전시된 유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얼마후에는 개방했던 이 성을 폐쇄해 버렸다. 취재진이 갔을 때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감시인들의 눈을 피해 반대쪽 산을 타고 넘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30분쯤 올랐을까. 산등성이에 갑자기 군대의 '엄폐로' 같은 것이 나타났다. 오랜 세월 동안 땅 속에 숨 죽인 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그날을 기다렸을까. 온전한 형태가 너무도 경탄스러웠다.

글 崔正岩기자 jeongam@imaeil.com

사진 金泰亨기자thkim@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