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명기의 '광해군'

조선조 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은 폭군, 패륜아였는가 아니면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였는가? 광해군에 드리운 부정적 이미지와 편견을 일단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여다본다면 어떤 인간상이 그려질까.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인 한명기씨의 '광해군'(역사비평사 펴냄)은 첩의 자식에서 용상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 등 파란많은 삶을 살다간 '광해군 다시 읽기'다.

광해군은 애초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첩의 몸에서 그것도 둘째로 태어났고 아버지 선조의 총애도 받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몇몇 신료들의 천거에 의해 엉겁결에 왕세자가 된 그는 일선을 누비며 전쟁을 지휘하면서 신망을 얻는다. 이 때문에 위신이 떨어진 선조는 점차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선조가 늘그막에 인목대비라는 처녀에게 새 장가를 들어 적통인 영창군을 얻는 등 언제 왕세자 자리에서 실족할지 모르는 염려속에서 광해군은 17년을 버텨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 그는 임진왜란 때문에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져 내리는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노심초사했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동의보감'을 반포한 것은 그가 남긴 업적의 상징이다. 나라 밖으로부터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명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후금과의 싸움에 줄다리기 외교를 해야했다.

하지만 당쟁은 심화됐고 역모사건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창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광해군에게 협력했던 대북파 신료들은 화근을 없애자고 부추겼고, 소심한 광해군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영창군이 살해되고 인목대비는 유폐되었다.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멍에를 쓰고 만 광해군.

1623년 왕위에 오른지 16년째 되던 해 인조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났다. 쿠데타 세력들은 '패륜'과 '명(明)의 은혜를 배반한 것'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 쫓겨난 직후 광해군의 아들은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돼 자살했고 며느리도 스스로 목을 맸다. 부인 유씨는 쇼크로 눈을 감았다. 연쇄적인 참극을 당한 광해군은 강화에서 교동으로, 교동에서 제주로 귀양지를 옮겨 다니며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제주에서는 시중드는 계집종한테까지 구박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1641년 권력무상을 뼈져리게 느낀 그는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쓸쓸히 눈을 감는다. 광해군이라는 이름 대신 '혼군(混君·어리석은 임금)', '폐주(廢主·쫓겨난 임금)'라는 이름만 얻었다.

그러나 저자는 광해군에 대한 이같은 평가의 상당 부분이 편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주목되는 부분은 광해군의 외교력. 조선의 군주 중 주변국의 동향과 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인물이 광해군이었다는 평가다.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후금(훗날 청나라)과 몰락을 코 앞에 둔 명나라의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의 외교력은 한마디로 탁월했다는 것.

이처럼 국가 보위와 민족 생존에 힘쓴 광해군이 축출되고, 폭군으로 몰린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제시한 하나의 사료가 그 배경을 짐작케 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초고. 조선왕조실록 중 정서본과 중초본이 동시에 남아 있는 이 원고에는 붉은 줄이 그어지는 등 먹 자국이 어지럽다. 두 책을 비교해보면 일기 편찬 과정에서 자행된 '광해군 죽이기'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인조반정이후 거의 전멸해버린 북인들의 행적은 오롯이 승리자인 서인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들은 '이것이 어찌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라는 대목을 붉은 먹으로 지우는 등 광해군에게 유리한 부분을 없애고자 했다.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 저자는 광해군의 극적인 삶과 당시 시대상을 이 책을 통해 추적하면서 가려진 진실을 더듬어 보고 있다.

徐琮澈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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