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모임

"'삼국유사'에는 이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있어요. 신라 문무왕시대 의상(義湘)이 화엄종을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여기에는 도둑의 무리가 살고 있었죠. 이때 용이 커다란 바위로 변해 공중에 떠서 도둑들을 몰아내고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로 지었다고 합니다…"

이쌍희(40·대구) 변호사는 지난 2월 영주 부석사에 다녀온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게 없을까 고민하다 고교 동기들과 만든 역사문화기행모임의 첫 나들이. 참가 인원 37명. 초등·중학생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해선 안되겠다 싶어 서툰 실력으로 새벽 3시까지 인터넷 바다를 헤매며 부석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그리곤 '달달' 외워 발표에 성공! 대신 잠을 좀 설쳤지만 그래도 "역사에 박식하다"는 소리를 들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변호사가 회장으로 있는 '영목회(永睦會)'는 별난 고교 동기 모임이다. 남자들끼리 모여 술 마시고 가족 동반 체육대회나 갖는게 고작인 여느 동창회와 달리 이 모임에선 아이들이 주인공. 매달 한번씩 나서는 방문지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유익한 곳으로 고르고, 관광버스를 타도 아이들이 볼만한 비디오테이프를 튼다. 지난 3월엔 문경새재 '왕건' 촬영 세트장과 도요지를 방문했다. 4월엔 청도 각남초교 향토사료관을 관람하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놓고 이 모임 회원인 이수동(40) 화백이 품평했다. 이 화백은 "문화유적지를 찾아 교육적 효과도 크고 아이들이 또래끼리 어울려 즐거워 한다"며, "가정의 화목을 쌓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모임들이 늘고 있다. 일반 사회단체들이 주관하는 행사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차원을 넘어, 주체적으로 부모와 자녀가 한마음이 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다양하게 만들고 있는 것.

매주 일요일 낮 12시쯤 경산 용성초교 운동장에선 남녀 초등학생들의 축구 열기로 더위도 멀리 달아난다. 아이들과 함께 뛰는 최창본(40·영남대 동물생명공학과) 교수와, 구경하며 응원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이젠 낯익은 주말 풍경이 됐다.

전문 축구선수도 아닌 최 교수가 일요일마다 '축구교실'을 열게 된 사연. 자신만 아는 1등짜리 보다 자연에 겸손해 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고은(12) 한결(10) 두 아들을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시키고 집을 청도 산골마을로 옮긴게 일년 반전. 시골생활에 낯설어 하는 두 아들과 함께 뭔가를 해야겠다 생각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뛰는 최씨와 두 아들을 본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지금은 20여명이 청·홍팀으로 나뉘어 시합을 벌이고, 한번씩 영남대 교수들도 자녀와 함께 참가하고 있다.

"아저씨, 내일 축구하죠?" 토요일 오후부터 아이들의 전화를 받느라 최 교수는 바쁘다. "어머니들은 내 아이가 어떻게 뛰는지 와서 지켜봅니다, 아버지들도 심판이라도 봐주며 많이 참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동화와 모녀들'은 엄마와 딸의 모임. 대구여성회원 5명이 매주 모여 아이들과 함께 동화를 읽고 비디오도 보고 아이들에게 유익한 책을 골라주는 공부도 한다. 아이들이 1~9세로 어려 모이면 항상 정신이 없다. 같이 책을 보다가도 누구는 아이 우유 태우러, 누구는 쉬-하겠다는 아이 화장실 데려다 주러 자리를 뜨기 일쑤. 그래도 남은 사람끼리 진도는 계속 나가는게 불문율.

아이들도 또래끼리 어울려 매주 모임이 즐겁기만 하다. 동생이 없는 산하(4)는 모임장소에 들어서기도 전에 "언니 왔다"하며 한살 어린 단아를 찾을 정도로 모임을 손꼽아 기다린다.

모임장인 장영숙(34)씨는 "아이들에게 동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엄마가 스스로 깨닫고 아이와 함께 책을 읽음으로써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책읽는 습관을 갖게됐다"고 했다. 아이가 있는 엄마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金英修기자 stel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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