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적병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입니다. 비록 적이지만 피를 나눈 동족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고, 그냥 물러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머니도 형제들도 못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집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국군 제3사단 학도병 이우근(李佑根)은 포항여중(포항시 북구 학산동. 현 포항여고)전투 직전 수첩에 남긴 이 글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됐다. 펜 대신 총을들고 함께 사선에 뛰어들었던 동료 학도병들도 교정에서 이름모를 들꽃이 되었다. 3사단 후방지휘소가 있던 포항여중에 71명의 학도병들이 도착한 것은 1950년 8월 9일 저녁. 그러잖아도 후방지원 병력이 부족했던 김석원 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학생들에게 M1소총을 지급하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중대장과 소대장도 자체 투표로 선발토록 해 '제3사단 직할 학도의용군 중대'란 공식명칭까지 부여했다.
11일 새벽 3시경. 포항여중 북쪽 2km 지점의 소티재(포항~흥해간 고갯길)에서 울려온 총성이 학도병들의 선잠을 깨웠다. 학도병들은 2개의 소대로 나눠 측백나무 울타리를 따라 경계구역을 정한채 인민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동이 틀 무렵. 갑자기 총성이 멎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그런데 잠시후 북서쪽 산기슭에 난데없는 녹색 신호탄이 치솟았다. 운명의 예광탄이었다. 이윽고 따발총을 멘 수십여명의 인민군이 학교 외곽에 나타났다.
인민군 12사단의 1개대대 병력과 766 부대 일부병력이 포항시내로 진격해 온 것이었다. 결사항전. 학도병들은 사령부 요원들도 철수하고 없는 학교에 남아 고군분투했다.
고막을 찢는 폭음, 작열하는 박격포탄. 피투성이가 된 교복차림으로 학도병들은 '어머니'를 부르며 쓰러졌다. 학교 마당이 온통 포탄 웅덩이로 변했을때 '웅웅'하는 굉음과 함께 정문 앞에 2대의 인민군 장갑차까지 나타났다. 불가항력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교정을 엄습해 왔다.
무기고에서 탄약을 꺼내오던 소대장(유명욱)이 팔에 부상을 입고, 연락도 없이 철수해 버린 사령부를 찾아 무전기를 들고 뒷산에 올라갔던 중대장(김용섭.서울사대 2년)도 목에 총상을 입었다. 어설픈 지휘체계마저 무너져 버렸다.
최기영(69) 포항시 6.25참전 학도의용군회 회장은 "이 전투에서 48명의 학도병이 전사하고 13명이 부상을 했으며 10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밝혔다. 학도병들의 비극과 더불어 사단 후방지휘소가 점령되자 포항은 완전히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포항전투는 동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을 두고 8.9월 한달간에 걸쳐 계속된 일대 공방전을 말한다. 영덕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진을 기도하던 인민군 5사단이 8월9일 강구를 점령하고 10일에는 흥해로 진출, 11일 포항을 장악하자 영덕 장사리에 포위된 3사단 주력은 해상철수를 단행했다.
철수시간은 16일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 철수지점은 독석리(송라면 방석2리) 해안으로 정했다. 4척의 LST(상륙용 함정)에 80% 가량의 승선이 이루어졌을 무렵, 철수작전을 간파한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LST가 움직였다.
함정의 선장과 선원들이 모두 미군의 용역을 받고 온 일본인들로 포탄이 날아오자 그냥 출발하려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단장과 참모들도 아직 타지 못했고 20%의 인원과 물자가 남은 상태였다.
다급해진 상황. 20여명의 장병들이 헤엄을 쳐서 함정으로 기어 올라갔다. 권총으로 함선을 위협, 배를 다시 접안시키는 우여곡절 끝에 철수작전이 완결됐다. 부상자를 포함한 사단병력 9천여명과 경찰 약 1천200명, 공무원과 노무자.피난민 등 1천여명이 함정에 승선했다.
구룡포로 철수해 전세를 가다듬은 3사단은 9월1일 미명을 기해 포항 북쪽의 인민군에 총공세를 취했다. 인민군도 전면공세로 나왔다. 포항북쪽 외곽지대에는 예측 불허의 혼전이 지속됐다.
그러나 안강쪽의 수도사단 전선이 무너지면서 3사단도 9월5일 전부대를 다시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돌파에 성공한 인민군들도 후속 지원부대와 보급이 미치지 않아 뒷심이 빠진 늦여름 더위와 함께 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서풋 다가선 가을, 최후의 공방을 가름할 대결전을 앞두고 형산강은 다시 핏빛 전운에 휩싸였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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