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구려 옛땅을 가다-두번째 도읍지 국내성

고구려 첫 수도 졸본(卒本·지금의 요녕성 환인)에서 두번째 도읍지 국내성(國內城·지금의 길림성 집안)까지는 산길, 비포장길로 180㎞.

2천년전 유리왕의 도읍 이전 행차를 더듬어 본다는 마음에서 포장이 돼 있어 편하게 갈 수 있는 환인-통화-집안 코스보다 환인-집안 직선 노선을 택했다.

5시간 정도는 달려야 집안이 나온단다. 지금은 그래도 도로가 넓어서 다행이지 그때는 수레조차 다니기 어려운 소로였으리라.

첩첩산중을 뚫고 오로지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가는 유리왕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사랑하는 치희를 떠나 보낸 비통한 심정으로 '황조가'를 지었을 때의 마음보다 더 비감했으리라.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천도한 때는 유리왕 22년(서기 3년).

제사에 쓸 도망간 돼지를 쫓아 국내성까지 갔던 설지가 돌아와 왕에게 고했다. "국내성은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기름지고 산짐승·들짐승과 물고기가 풍부하니 그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표면적 이유 말고도 졸본지역의 강성한 부족 세력들을 억누르고 북방 유목민족과 서쪽의 한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도읍 이전이 필요했으리라.

고구려 성은 거의 대부분 산성인데 비해 국내성은 드물게 평지성이다. 국내성이 있는 집안은 고구려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 처음에는 한자로 輯安으로 썼다가 1965년 중국 당국이 발음(지안)이 같은 集安으로 바꿨다.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24년 동안 수도였는데 마음대로 지명을 바꿔버렸다고 생각하니 까닭모를 울분이 치솟는다.

국내성은 당초 토성으로 이미 성의 형태가 갖춰져 있던 것을 유리왕이 도읍을 옮긴 후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 당시에는 동벽 555m, 서벽 665m, 남벽 750, 북벽 715 정도였단다. 방어시설인 치·적대 등도 7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집안 황금가공공장이 있는 자리 서벽에 하나만 남아 있다.

서쪽으로는 통구하(洞勾河)가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나머지 3면은 해자(垓子)를 파서 적의 접근을 막았다. 조선족 안내인은 "청나라 때만 해도 너비 10m가 넘는 해자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국내성에서 현재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부분은 북쪽 성벽. 300m 정도가 남아 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낮은 곳은 4단, 높은 곳은 8~9단 정도 돌들이 쌓여 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고 있는 상황.

100m 정도 구간은 성 바깥 부분이 완전히 허물어 새로 쌓았는데 고구려 시대 때부터 보존돼 오는 부분과 비교하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성 옆으로는 주민들의 빨래걸이대가 길게 늘어서 있으며 성벽 위에는 채소밭, 놀이터가 들어서 있는 등 가장 오랜 기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대접을 전혀 못받고 있는 상태였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모두 없어져 버렸고 서벽은 구간, 구간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 주택들이 뒷담으로 사용하고 있어 외부에서는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중국은 중요 문화재를 국보급으로 분류해 국가에서 직접 관리한다. 이름있는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국보급이다. 그러나 국내성은 성에서 관리하는 문화재로 격이 낮춰져 있다. 중국이 국내성을 보는 시각이 어떠한가를 잘 나타낸다. 이 성이 없어지면 중국에 남아 있는 평지성은 없어지는 셈이다.

고구려 성은 변과 변이 만나는 지점이 직각이 아닌 곡각을 이룬다는 사실도 국내성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북성북로와 단결로가 만나는 부근, 동북쪽의 선형 지점 등이 그것이다. 서길수(서경대) 교수는 "고구려인들이 성을 쌓을 때도 예술적 감각을 불어 넣은 증거"라고 해석했다.

집안 시민들에게 있어 국내성 안에 사는 것과 밖에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윤명철 탐험문화연구소장은 "국내성은 왕을 비롯한 귀족 관료들이 거주한 궁성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일정 신분 이상이면 대부분 성벽 안에 있는 아파트에서 거주한다.

국내성은 이곳 조선족들에겐 희망이다. 지난 95년 시장이 된 최정남씨로 인해 조선족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최씨가 시장이 된 것은 궁전터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 조상의 음덕으로 생각한다. 조선족 김송학(40)씨는 "국내성 보존은 이런 의미에서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고구려 전문가 김용만씨

'고구려의 발견',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책을 펴내면서 일약 고구려 전문가로 부상한 김용만(36)씨.

'10년간 폭넓게 공부하고 그 다음에 글을 쓰라'는 대학원 은사의 유훈에 따라 80년대말부터 10년동안 고구려 연구에만 몰두해 왔다.

고구려의 발견은 그 첫번째 결실인 셈. 고구려를 문명사적으로 분석한 고구려 통사로 평가받는다.

김씨는 고구려를 실패한 역사로 규정한다. "역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찬란했던 문명을 후대에 전달하지 못한데 따른 책임 추궁"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고구려가 5~6세기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을 창조하고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나를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조선과 고구려 국력의 차이를 '가마문화와 수레문화'라는 틀에서 찾아내는 독특한 해석을 시도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고구려왕 이름은 즉위 때의 업적이나 무덤의 위치에 따라 사후(死後)에 정해진다. 대무신(大武神)왕은 이름에서 보듯 대단한 위용을 지녔던 왕.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등장할 만큼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대무신왕은 낙랑을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접근, 적의 침입 때 소리를 내 방비케 하는 자명고를 찢어 없애게 한 뒤 낙랑을 정복했다. 사진은 집안박물관에 보관된 상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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