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북대화 북측 '얼굴' 98년 비료회담후 중병설

제1차 남북 장관급회담에 참가할 북측 대표단 단장(수석대표) 전금진 내각 책임참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남북대화의 북측간판으로 남한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대남분야에서만 일해온 북한의 손꼽히는 대남전문가로 30대 후반부터 남북대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전금철이란 이름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본명은 전금진으로 전해졌다.

그의 북한내 직함은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대외용 직함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 등이다.

1933년 2월생으로 알려진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곧바로 노동당 대남사업부서인 사회문화부(현 대외연락부) 지도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았으며 70년께 통일전선부로 옮겨 과장으로 일했다.

전 수석대표는 지난 72년 11월 김영주 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이 북측 위원장을 맡았던 남북조절위원회의 북측 대변인 및 간사로 활약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80년에는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대외적으로 조평통 부위원장 직함을 가졌으며 지난 85년 7월에는 남북국회회담 제1, 2차 예비접촉 북측 대표단장으로 임명돼 판문점회담에 참가했다.

그는 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 위원, 91년 1월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92년 10월 남북화해공동위 북측위원장 등 각종 대남관련 직함을 같고 맹활약했다지난 94년 7월부터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 6월 21일 15만t의 대북 쌀무상 지원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석했고 한달후인 6월 30일 대북 쌀수송선 '씨 아펙스'호 인공기 강제게양사건시 유감을 표시한데 이어 95년 7월과 9월에 있은 제2, 3차 남북 베이징회담시에도 북측대표로 활동하는 등 남북간의 각종 협상서 수석대표로 활약했다.

지난 98년 4월에는 정무원 책임참사 직함을 갖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남북당국대표 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또 지난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시에도 김대중 대통령을 백화원 영빈관에 안내하고 환영만찬과 순안공항 환송식에 참석했다.

전 수석대표는 대남분야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9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82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으로 선출돼 지금(10기)까지 유지하고 있다.

한 때 일부에서는 전 수석대표의 신상을 두고 갖가지 설이 나돌았다.

그는 지난해 4월 27일부터 5월 4일까지 남북노동자축구대회 협의차 방북했던 민주노총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죽은 것으로 소문까지 났는데 이렇게 살아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지난 98년 4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남북비료회담 이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자 비료회담의 결렬에 대한 책임을 졌거나 중병에 걸린 것 아니냐는 등 각종 설이 남한에서 나돌았던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전 수석대표가 대남분야의 베테랑으로, 남북대화의 간판으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실무에 능하고 특히 협상전략과 관련한 각종 전술기획에 뛰어났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말이 없고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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