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향 가창강산은 어떻게 변했느냐

○…김일성대 수학과 교수로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은 조주경(69. 영양군 영양면)씨는 어머니 신재순씨(89)를 보자 "오마니…" "오마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신씨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50년만에 만난 아들을 붙잡고 통곡했다.

신씨는 외아들인 조씨가 두살 때 남편과 사별했으며 그후 조씨가 경북대사대부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로 진학할 때까지 자랑으로 삼았다고. 그러나 전쟁중에 조씨가 북한으로 가버리자 실의에 잠긴 신씨는 50여년 동안을 부산의 작은 사찰에서 생활했다. 신씨는 "부처님이 보살펴 우리 아들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됐다"며 조씨를 부둥켜안고 놓을 줄을 몰랐으며 조씨는 "그동안 고생많으셨다"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북한 일행 중 선두에서 상봉장에 들어온 도재린(65.예천군 용궁면)씨는 형 재익(79), 재하(69)씨와 누나 정순(71)씨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자 이들에게 와락 덤벼들어 포옹. 누나 정순씨가 "니가 참말로 살아 있었나, 얼굴 한번 보자"고 울음을 터트리는 사이 형제들은 부둥켜 안고 포옹을 풀지못했으며 30여분이 지난 뒤에야 다소 진정하는 모습이었다. 자리를 정돈한 뒤에는 둘째형 재하씨가 손수 마련한 금반지와 재린씨가 다녔던 동부국민학교 1회 동기생들이 마련한 손목시계를 선물로 재린씨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재린씨는 형 재하씨가 '용궁면 어린이집 원장' 명함을 내밀자 "어린이집이 뭐냐", 명함의 교회장로 직함을 보고도 "장로가 뭐냐"고 되묻기도 하는 등 남한 생활상에 대해 생소한 표정으로 궁금증을 보였다.

○…전쟁 당시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를 다녔던 양원렬(70.대구 달성군 가창면)씨는 형 진열씨(82) 얼굴이 다소 상기된 것을 보고 "나도 술만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이야"라고 말했다. 진열씨는 "그런걸 보니 영락없이 우리 식구구나"라고 화답했고 원렬씨가 "형수는…"이라고 묻자 "작년에 숨졌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가족 중에서 "교수를 하신다니 너무 기쁘다"고 말하자 원렬씨는 고개만 끄덕였다. 실제로 원렬씨는 월북 후 김일성 종합대학 수학과를 나와 현재는 김일성 주석의 동생 이름을 딴 김철주 사범대학 교수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렬씨는 가족들과 만나는 동안 줄곧 "고향 가창의 강산은 어떻게 변했느냐"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표시했다.

○…"형님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많으셨습니까"

의용군에 차출됐다가 50년만에 돌아온 권중국(68)씨는 테이블위에 놓인 부모님의 영정을 쓰다듬으면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생 중후(60.경북 영주시)씨는 어머니는 "3년전에 돌아가셨다"면서 "조금만 더 빨리 남북길이 열렸으면…"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고향집과 고향마을을 찍어온 사진들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권씨는 여동생 분남씨와 차희씨 등 동생들을 한 사람씩 껴안고는 "어릴때 모습 그대로다"며 50년 동안의 회한을 쓸어내렸다. 권씨는 "빨리 통일이 돼야 조카도 삼촌도 보게 되는 것 아이가"라고 말했다. 권씨의 말투에는 50년 세월도 씻어내지 못한 경상도사투리가 배있었다.

○…문경시 산북면이 고향인 황기수(70)씨는 벅찬 재회의 기쁨을 "빨리 통일시키고 싶은 생각뿐입니다"라고 표현했다. 동생들과 사촌들을 만난 황씨는 "김정일 장군님의 영도를 받들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며 "장군님의 영도가 있어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동생 기봉씨는 "건강한게 제일 좋고 오래오래 살아 자유롭게 다시 만나야 합니다"라며 형을 다시 부둥켜 안았다.

황씨가 "50년 동안 생사조차 몰랐는데 이렇게 만나는 게 가장 큰 선물 아니냐" 며 동생들에게 줄 변변한 선물 하나 갖고 내려오지 못한데 대해 미안해하자 여동생 기순씨는 "내일이 제 생일이니까 오빠는 50년만에 가장 큰 생일선물을 주신 것"이라며 손을 내젓고 "내일은 같이 만나 생일잔치를 열자"고 기뻐했다.

○…등록금을 가지러 고향(안동시 임하면)에 왔다가 행방불명됐던 김영기(67)씨는 세 동생들을 만나 활짝 웃었다.

전기화학분야의 연구사로 있다는 그는 "형제를 만나니까 공동선언을 집행하는 마음은 남북이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 외세를 내쫓고 조국통일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동생이 가장 생각이 났다"며 동생 창기씨의 손을 꽉잡던 그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뜯어보고는 "한 번 봐도 얼른 알겠다"면서도 둘째 여동생 분의씨에 대해서는 "넌 세파에 시달렸겠구나"라며 눈시울을 붉혓다.

김씨는 서울에 대해 "평양에 비해 질서가 없다. 평양은 깨끗하고 질서가 있는데 비해 서울은 어지럽고 차가 많고 공기가 탁하다"고 말했다. 徐明秀기가 diderot@imaeil.com 李相坤기자 lees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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