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길 나의삶-경주박물관 하계연구관 박방룡씨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포레스트는 쉼없이 내처 뛰는 것만으로 작은 인생 승리를 거둔다. 뜀박질로 대학에 가 풋볼 스타가 되고, 월남전에선 빠른 발로 다친 동료를 적진에서 구해내 영웅이 된다. 사랑하는 연인을 되찾는 것도 뜀박질덕이었다. 국립 경주박물관 박방룡(朴方龍·47) 학예연구관. 어릴 적 '꼬마 고고학자'에서 이젠 경주박물관 관장 자리 다음인 학예관에 오르기까지…. 늦깎이 공부로 고졸 인생을 박사 삶으로 거듭 태어나는 인생승리까지….

경주박물관에서 일하는 것 외엔 다른 것을 소원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박 연구관의 우둔하리만치 한 우물만 파 온 인생 역정도 그렇게 포레스트를 닮아 있다.경주 유적에 대해 쓴 박 연구관의 논문과 보고서만도 이미 70여편. '국내 최고의 경주 유적 전문가'란 수식어도 오직 한 길로만 달려왔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경주 유적에 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과 해박한 관련 지식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경지에 들어섰지만 학벌 중시의 우리 사회 풍토가 오랫동안 그의 인생을 고비마다 헤집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을 학벌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우대하는 분위기이지만 그 전에는 제약이 많았지요. 뒤늦게 대학에 간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는 가난 탓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당초엔 그것이 문제가 안됐다. 당시엔 경주에 대학이 전혀 없기도 했지만 어릴때부터 경주 유적을 탐구해 와 달리 그 분야 공부를 위해 꼭히 대학 진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경주의 도지동에서 태어난 그는 집에서 불과 200m 정도 떨어진 이거사(移車寺)란 옛 절터에서 신라 기왓장 같은 것들을 장난감마냥 갖고 놀며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엔 돌화살, 돌도끼 등을 주워 모으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까마득한 옛 선조들의 '체온'이 손에 전해지는 듯 느껴졌던 까까머리는 중학생때 경주 노서동의 외가에 놀러갔다가 향토사학자 고(故) 윤경렬옹이 운영하던 '어린이 향토학교'(현 경주박물관학교)에 갔다. 유적의 보존·관리를 위해선 어릴때부터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만든 이 학교에서 소년은 야외절터·첨성대 등 유적지에서 현장 학습을 하며 경주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수업을 받게 됐다. 경주교육청이 만든 경주 고적 교본과 문화재 관련 기사를 꼬박 꼬박 모아 둔 신문 스크랩도 소년에겐 훌륭한 참고서가 됐다.

커서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그 소원을 향한 소년의 달음박질은 고교졸업때까지 계속됐지만 학벌위주 사회풍토는 냉담했다. 쌓은 실력과 달리 고졸학벌이 문제였다. 집에서는 장남인 그에게 울산 공장에 나가 일 할 의향을 넌지시 떠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의 일념을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뜻이 있으면 길도 열린다던가. 고등학교 졸업 다음 해인 지난 73년 4월,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경주 조양동의 한 야산에서 우연히 중국 당(唐)나라의 대표적 용기인 당삼채(唐三彩) 뼈항아리(骨壺)를 줍게 된것. 그 골호가 꿈을 푸는 열쇠가 됐다. 뭔지를 몰라 당시 경주박물관 학예사이자 어린이 향토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강우방(현 경주박물관장)씨를 찾아가게 됐고 이를 계기로 박물관 일을 거들 수 있게 됐다. 이어 군에서 제대한 77년부터는 박물관 '고용인'으로 일하게 됐다. "당삼채 골호가 이를테면 행운의 '복권'인 셈이었지요"

집보다 박물관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고졸 학벌은 여전히 걸림돌이 됐다. 82년엔 정식 학예연구사가 될 기회가 있었지만 학력때문에 별정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수랴. 오히려 이 때부터 그의 경주유적에 대한 논문과 보고서 발표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첫 논문인 '신라 관문성의 명문석 고찰'(82년 12월)을 비롯, 자신의 관심 분야인 신라 왕궁 모습 고증 등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줄줄이 발표됐다.

마침내 86년부터는 못다한 공부에 도전했다. 34세의 만학. 주경야독으로 동국대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를 지원했지만 5점차로 고배를 들었다. 재수시절. 오기가 생겼다. 창피하다고 여겨 첫 해엔 가지 않았던 학원 수강도 했다. 시험 당일,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가로막았다.

"아내의 갑상선 재발로 병원에 입원해야할 형편이 됐어요. 막막하더군요. 대학은 나와 인연이 없구나, 자포자기했지요"

평소 사위의 집념을 보아 온 장모가 '처는 내가 돌볼테니 시험을 치러가라'고 등을 떠밀었고 결국 일년전 고배를 든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주경야독. 직장에 소홀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느라 더욱 힘들었다. 다음날 낮에 강의가 있는 경우엔 숙직을 자원했다. 숙직하면 이튿날 직장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료들에게 표내기 싫어 강의책도, 노트도 가져 가지 않았다. 기자마냥 작은 메모지에다 강의 내용을 적었다.

이왕 내친 김에 석사(동아대)는 물론 '신라도성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동아대)까지 해치웠다. 대학입학 후 10년. 인문학 전공자가 학·석·박사를 10년내로 모두 따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박물관 일을 하며 써 온 수십편의 논문이 기초가 됐기에 가능했다.

그같은 노력은 98년의 명예퇴직에 이어 곧바로 박물관 연구직의 꽃인 학예연구관으로 특채되는 열매를 맺게 했다. 그의 실력을 아끼는 주위사람들의 도움도 한 몫했다.

박 연구관은 요즘 오는 9월 1일 개막될 경주문화엑스포의 신라 왕경(王京) 복원에 자문해 주는 일로 바쁘다. 경주대와 동국대 등에 고고미술학과 문화재 관련 강사로도 출강, 후진양성에도 적극적이다.

"신라 왕경에 대한 논문이 아직도 불만족스러워요. 일본, 중국, 동아시아 등 다른나라 도성을 비교 분석해 더욱 완벽한 신라 왕경 복원을 필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련 단행본 저서도 한권 낼까 싶고요"

영화 속의 우직한 마라토너 포레스트처럼, 박 연구관도 좌고우면없는 한길로만 내닫고 있다.

裵洪珞기자 bhr@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