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창가에서...다정도 병이런가(윤주태.출판부장)

한민족은 정(情)에 약하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광복절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장소에서 또한번 입증됐다. '슬픔의 강' 을 너머 '통곡의 바다' 를 이루는 바람에 한반도는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하는 것이 삶의 고통 중에서 으뜸이거늘 영원히 못 만날 줄 알았던 사랑했던 사람을 만났으니 눈물이 앞설 수밖에 없고 이런 사람과 또다시 기약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현실 앞에 어찌 피눈물인들 마를 수가 있으랴.

가뜩이나 한(恨)많은 한민족은 굴절된 역사의 무대위에서 연출되는 7순, 8순 노인들의 '장한가' 를 듣고 펑펑 쏟아낸 눈물만큼이나 진한 카타르시스에 젖었다. 단장(斷腸)의 슬픔뒤에는 묘하게도 이처럼 인간을 순수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으니 정많은 한민족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랄까. 역시 정은 좋은 것인가 보다.

정에 약한 한국인

그러나 한편 다시 현실로 눈길을 돌리면 우리는 아직도 정이라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정의나 진실 같은 큰 줄기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워크아웃 당한 기업들을 조사해보니 상당수가 개선은커녕, 오히려 방만한 경영으로 수지를 악화시켜 놓았으며 오너경영진조차 자기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어 세무조사를 하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었다. 워크아웃이란 무엇인가. 능력이 없는 기업은 즉시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이 냉엄한 경제 논리인데도 부실기업의 부채상환을 연기해주고 이자까지 낮춰주며 재기의 기회를 주는 정 많은(?) 정부의 배려가 아닌가. 경제문제, 온정주의론 해결안돼

정은 물질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정은 정으로 갚아야만 제 맛이 난다. 또 내가 준 만큼 상대방이 주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이 섭섭해지는 것이 정이다. 그러나 정이라는 개념은 워낙 막연해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돈 떼이고는 살아도 정 떼이고는 못사는 게 한국인인 만큼 '내 마음도 몰라 준다' 며 사소한 문제로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경제문제에서만큼 정의 개입은 금물이다.

그런데도 다정다감한 정부는 기업정리 이전에 워크아웃이란 특혜를 마구 뿌려댔다. 이러게 깊은 정을 주었는데도 상대방이 이를 헤아리지 못했으니 발끈한 정부는 '세무조사' 라는 칼자루를 빼든 것이다. 그러면 세무조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세금은 가장 공정하게 징수돼야 하는 것으로 탈세의 의혹이 있으면 세무당국은 평소에 세무조사를 통해 이를 바로 잡아놓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정부는 이를 길들이기용 채찍처럼 문제가 생기면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뒤집어 얘기하면 '정이 가는 기업은 웬만한 탈세는 눈감아 주겠다' 고 간접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경제정책에 정이 개입되면 이렇게 문제가 꼬이게 된다.

정(情)보다 정의(正義)지켜야

중국 삼국시대, 제갈공명의 재주에 위협을 느낀 오(吳)장군 주유(周瑜)는 공명을 죽이려다 문득 그를 회유시키기로 마음을 돌렸다. 그래서 그의 진중에 있는 공명의 형님 제갈근을 시켜 공명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려 했다. 공명을 설득시키려 온 제갈근은 "너는 백이 숙제를 아느냐, 백이와 숙제는 비록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지만 형제 두 사람이 한곳에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공명이 형님의 마음을 얼른 헤아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정(情)이나 제가 지키려는 것은 의(義)입니다" 제갈근은 더 말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발길을 돌렸다.

이보다 훨씬 이전,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은 마치 오늘의 한민족을 향해 꾸짖듯이 한마디를 남겼다.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을 법으로 삼지 않으면(不法法) 일이 되지 않고 법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을 법으로 삼으면(法不法) 명령이 서지 않는다"

정이 많은 한국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된 정을 만끽하되 국제무대는 정보다는 오히려 비정(非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IMF체제를 졸업했고 남북통일이라는 험난한 계곡을 건너고 있다. 이 역사의 변곡점(變曲点)에서 정의주의(情誼主義)는 반드시 뿌리 뽑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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