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구려 옛땅을 가다(9)광개토대왕비

신라, 백제, 일본을 복속시킨 것은 물론 후연, 숙신 등 중원 대륙에 있던 북방 민족국가들까지 전부 속국으로 만들었던 고구려. 북으로는 몽골 지역에까지 진출, 그곳에서 말과 철을 가져와 경제·군사적 부흥을 이뤘다. 주역은 광개토대왕이다.이런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잘 나타나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비다. 지안(集安) 국내성 터에서 동쪽으로 4km쯤 가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북한(만포)-중국(지안) 국제철로를 만난다. 대왕비는 이 철길을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난다. 한눈에 고구려의 굳건한 기상이 체감되면서 감동이 절로 우러 나온다.

대왕비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역사서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이만큼 잘 나타내주는 사료는 어디에도 없다. 삼국사기보다 700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광개토대왕비를 제외하고서 우리는 고구려를 말할 수 없다.

높이 6.39m, 무게 37t. 세계 최고·최대의 비석. 글자 한자 한자가 손바닥 크기(14~15㎝)만 하다.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글자는 원문 1천775자인데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천590자 내외다. 한자 한자가 모두 국사요, 세계사다. 철책 보호대 덕분에 가까이에서도 확인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고구려의 혼은 그대로 느껴진다. 대왕비 관리소에서 탁본 축소본을 사서 비석과 직접 대조해 보면 관람의 재미가 배가 된다.

광개토대왕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져 있다. 첫번째는 고구려 건국신화. 두번째는 광개토대왕의 위업과 영토확장. 나머지는 묘지를 지키는 수묘인에 관한 것.

재질은 현무암질 화산암. 지안 부근에서는 이 돌이 나지 않는다. 이 무거운 돌을 어디에서 갖고 왔을까. 장군총을 쌓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경제력과 과학이 총동원된 것만은 분명하다. 현지에서는 백두산 천지에 있던 강용석(降龍石)이 화산 폭발 때 날아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거대한 비석을 받치고 있는 대석(臺石)은 아주 작지만 1천5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오고 있다. 대석밑은 흙으로 추정되는데 어떤 구조이기에 이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시대 묘비가 무덤 위에 자리잡았던 풍습을 근거로 광개토대왕비 밑에 대왕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실제 대석만 가지고는 이 거대한 암석을 떠받치기 어렵기 때문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비석이 손상될 우려 때문에 감히 하부 구조 확인은 엄두도 못내는 상태다.

이 비는 장수왕 3년 (414년) 세워졌다.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 이도학(43) 교수는 시사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비문의 본질은 왕실과 제국의 영속성을 보장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왕위를 계승한 장수왕은 선왕의 사망에서 왕국 전체의 분열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동시에 대왕에 대한 기억을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도 절감했다. 여기다 '39세로 요절한 대왕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효성으로 배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은 현재 금지된 상태. 워낙 무분별하게 탁본이 이뤄지다 보니 글자의 마모가 심하고 붕괴 위험까지 있어서다. 사진·비디오 촬영도 일절 못하게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청나라가 명나라 장수 모문용의 반정부 활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봉금제(封禁制)를 실시한 후 지안 일대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곳의 봉금이 풀린 1876년으로부터 4, 5년이 지난 어느날 이주해온 농부에 의해 발견돼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발견 당시는 허허벌판에 이끼와 흙먼지가 뒤덮인 채였다. 이끼를 태우기 위해 불을 지르면서 글자가 일부 마모됐다. 1927년 비호각을 만들어 비바람을 피하게 했다가 1990년대 중반 경남 진주의 한 사업가가 담장을 치고 번듯한 공원 형태로 만들었다.

일본인 사까와 포병중위에 의해 탁본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일본 군부에 의해 집중적으로 연구됐다. 비 해석에 대한 왜곡도 이 때 이뤄진다. 서길수(서경대) 교수는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를 귀중하게 여겨 일본 군함을 동원, 반출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밝혔다.

---박진석 전 연변대교수

중국 연길의 박진석(72, 전 연변대학 교수)씨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연구의 국제적인 권위자다. 연변대를 정년 퇴직 한 후 줄곧 광개토대왕비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은 현재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에 모두 합쳐 12개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 중 한국에는 서울대 도서관과 임모씨가 소유한 것을 원본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63년 중국과 북한이 공동조사를 벌일 당시 북한 장명선이 한 석회탁본을 현존하는 탁본 중 최고라고 주장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릴 당시 일본이 비문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그는 "그러나 글자의 마모가 심해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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