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길 나의 삶-사기장 윤광조씨

도예가 윤광조. 그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두가지 코드의 회로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바람'과 '순진무구'.

선가(禪家)6조 혜능선사가 선방에 있을 때의 일. 하루는 밖이 소란스러워 내다보았다. 젊은 행자 둘이 절마당 끝에 걸린 깃발을 보고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한 행자가 말하기를 "선사님 저기 흔들리는 깃발은 바람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깃발이 흔들리는 것입니까"고 했다. 그 때 혜능은 "네 마음이 흔들릴 뿐이다"고 일갈했다.

윤광조(尹光照.54) 사기장(沙器匠)이 자연 속에 묻히기를 갈망하면서 보금자리를 튼 곳은 경주시 안강 깊은 산중 '바람골'이란 골짜기다. 동네 노인네들 이야기가 정월, 이월이면 문밖에 벗어놓은 고무신이 날아가고 없다는 곳이 바로 바람골이다.

윤광조는 이 바람골의 바람받이에 서서 조주선사가 일러준 바람의 본모습, 즉 '정신'의 실체를 찾고자 세속과의 인연의 끈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의 집 거실을 들어서면 조그만 불단(佛壇)이 있다. 목탁과 간단한 불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그만 불단에는 고(故) 장욱진 화백의 해맑게 웃는 사진이 놓여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술에 곤드레가 되지않는 한, 매일 아침 장 화백이 모셔진 불단에 백팔배를 올린다고 한다.

장화백으로부터 순진무구한 영감을 얻고자 축원드린다는 것. 본시 착한 심성을 더럽히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간직한 장화백의 예술혼이 그의 인생과 예술의 귀착점이라는 설명이다.

윤광조에게는 무슨 인연들이 엇섞였길래 '바람'을 찾고 '순진무구'의 세계를 좇았을까.

1946년 함경남도 함흥생. 1.4 후퇴 때 가족이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전란중 미군정 고위관리를 지낸 부친과 사별. 6세 때부터 대한부인회 초대 조직부장을 지낸 어머니 밑에서 자람. 1965년 홍익대학교 도예과 입학.

정작 도예의 맥(脈)을 읽고 작품 방향을 잡은 것은 군(軍)시절이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복무하는 동안 분청사기의 오묘함에 빠져들게 됐다. 또 국립박물관을 들락거리며 혜곡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1984년 작고)란 걸출한 스승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제대후 분청사기라는 화두(話頭)를 잡고 이천, 광주를 돌아다닌 결과 대학을 졸업하던 1973년 '동아공예대전'에 문방구 세트를 출품,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윤광조는 자신의 말마따나 일찍이 '스타 예술가'가 된 셈이었다. 이듬해는 우리 도자기 원형을 찾아, 문화공보부 추천으로 일본으로 도자기 공부를 떠났다. 그러나 일년만에"우리 그릇은 우리 땅에서 만들어야겠다"는 깨우침을 얻고는 귀국해 버렸다.

윤광조는 서울 혜화동에 개인작업실을 내고 전통 분청사기를 오늘날 감각에 맞도록 바꾸는 작업에 몰두했다.

"무척 힘든 시절이었지요. 그 때 '성북동 비둘기'란 시(詩)로 널리 알려진 김광균씨가 가끔씩 퇴근할 때 찾아와서 작품들을 보고는 '좋은 것은 나눠봐야지 혼자만 갖고 있으면 되는가'고 하셨어요. 용기를 얻어 1976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세상의 이치는 한 곳에 빠지면 결과를 얻는 법. 78년 그가 그릇을 만들고 스승으로 모시던 장욱진 화백이 그림을 올린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개막 30분만에 전시품 모두가 팔리는 대성황을 이뤘고 세상은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작가가 한자리에 주저앉으면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증명하듯 새로운 그릇에 다시 심취했다. 태토로 그릇을 빚고 깎아내고 화장토를 칠하고 다시 그림을 새기고…. 이때 이후 윤광조의 작업은 '얽매이지 않음'의 미학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형식의 모방에만 매달리면 더 이상 작품일 수 없지요. 전통의 이름을 쓰고 옛날 그릇 옛날 문양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모조일 뿐이지 더 이상 작품이라고 할 수 없지요. 전통은 창조되는 것이니까요. 작가에 있어서 모방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어요. 진정한 작가라면 자기 자신의 작품도 스스로 모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해요."그럴즈음 윤광조는 평소 동경하던 자연을 찾아 경기도 광주로 옮겨 새 가마를 박게 된다. 가마를 박던 날 스승 최순우는'급월당(汲月堂)'이란 당호를 붙여줬다. 광주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는 '달속에 있는 선불교의 정신'을 길어 올리기에 몰두했다.

도예작업이란 마치 '정신'이란 음률을 악보에 옮겨내는 작업과 같은 것. 작업과정은 물이 흐르 듯 무위자연의 정신과 기본적인 재료인 흙과 상응해야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이 즈음이다.

생명의 흐름이 메말랐을 때 윤광조는 송광사 선방으로 들어가 '방하착(放下着-내려놔라)'이란 화두를 안고 삼매에 들었다. 80년대 후반들면서 '물레'라는 도구를 벗어 던지고 자신을 옭아맨 껍질을 깨치고 나왔다. 작업들은 한층 성숙해지고 흙과의 결합은 더욱 견고해졌다. 정신세계에의 천착으로 그릇들은 관(觀), 정(定), 화음(和音), 환희(歡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의미 풀이로 옮아갔다.

그런만큼 세상의 뭇 인연들은 그에게 참지못할 공해로 압박해왔다. 윤광조는 다시금 좀더 자연과 뒹굴 수 있는 은둔의 공간이 필요했다. 95년,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홀연히 안강 바람골로 찾아들었다.

형체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의 본 모습을 찾는 작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 작업의 첫 번째 고민은 전통의 정신속에 어떻게 새로운 조형언어를 탄생시키느냐에 있었어요. 결국 이것은 뿌리를 보는 눈에 가슴속 기교가 어떻게 가미되어야 하느냐는 문제였어요. 나는 '인공이 배제된 조형미'에 포인트를 맞춘거죠"

이제 윤광조의 작품은 서양인들의 눈에도 더 이상 '신비의 동양 정신'이 아닌 서양의 물신을 인도하는 증거로 비춰졌다. 1991년 호주 시드니에서 첫 해외전시회를 가졌을 때 현지의 반응은 '자연과 인간의 자유를 표현한 거장'으로 일컬어지며 뉴 사우스 웨일즈 국립미술관은 최초로 한국 현대미술품을 구입했다.

세계적인 세라믹 아티스트 인명록 '누벨 오브제'에 그의 이름을 현시대 최고의 도예가들과 함께 기록했다. 또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벨기에의 마리몽 로얄 미술관, 호주의 NSW국립미술관 등도 그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젠 '들고 있던 것도 놓아버리고' '바람'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 한 자연인의 산중문답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단다.

우리 도예계의 큰 별 윤광조. "우리 도자기의 요체는 곧 정신이오"라며 형형한 눈빛을 쏟아내지만 소줏잔을 기울이며 "맛 쥑인다"는 얼굴에서 작가입네하는 고상함 보다 해맑은 동자승 모습이 오버랩 된다.

全忠瑨기자 cjje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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