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OPEC 40주년

말썽많은 OPEC(석유수출국 기구)가 오는 14일로 창설 40주년을 맞는다. 1960년 9월14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주요 5개 산유국이 이를 출범시켰던 것. 그 뒤 수많은 부침을 거듭했으나 개발도상국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기구가 됐다.

출범 당시엔 OPEC가 오래 생존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OPEC는 성공과 좌절, 분열, 피비린내 나는 전쟁, 쿠데타, 혁명, 석유 메이저와의 격돌 등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40년을 지내왔다.

회원국도 갈수록 증가, 사우디.베네수엘라.쿠웨이트.이란.이라크 등 발기 5개국 외에도 카타르.리비아.인니.UAE.나이지리아.알제리.에콰도르.가봉 등 8개국이 더 합류해 총 13개국으로 늘었었다. 지금은 가봉.에콰도르가 탈퇴, 11개 회원국이며, 본부는 오스트리아(빈)에 있다.

창립 주역 중에서는 베네수엘라 페레스 알폰소, 사우디의 압델라 타리키 등 두 사람이 특히 유명하다. 알폰소는 원유의 염가 판매를 종식시키고자 했고, 타리키는 사우디 유전을 운영하던 미국기업 아람코의 국유화를 주창해 '붉은 셰이크'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값싼 석유가 넘쳐나던 출범기에는 OPEC가 이목을 끌지 못했다. 뉴욕타임스 신문조차 "단순한 카르텔 하나가 새로 생겼으며 곧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던 것. 그러나 이 예언과 달리 OPEC는 기존 질서까지 간단히 뒤엎어 버렸다. 회원국들은 1969년 리비아에서 카다피의 쿠데타가 발발한 후 위력을 인식했고, 이는 유가인상과 외국자본 석유회사의 국유화로 구체화했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면서 1973년 10월 이란-사우디가 역사적인 유가 결정 협정을 체결, 석유 메이저와 협의 않고 유가 인상을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 협정 후 석달만에 유가는 4배나 뛰었다.

그 뒤 OPEC는 석유 금수조치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이르기까지 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군사 원조하자 미국.네덜란드 등에 대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 이에 미국 등 원유수입국들은 IEA(국제 에너지기구)라는 대응체제를 1974년 11월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에 일년 뒤 OPEC는 회원국 간에 가격 정책에 보조를 맞추는 체제 구축을 추진했다. 그러나 걸프전 때를 제외하고 1986년 이후 유가는 다시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OPEC 회원국들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무시한 채 1997년에 산유량을 10% 늘리는 결정적 실수를 범하기까지 해, 유가는 40%나 폭락하고 회원국들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후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는 약 1년 반이 걸렸다. 1999년 3월 회원국들은 배럴 당 10달러 선으로 폭락해 있던 유가를 끌어 올리기 위해 감산을 결정했다. 그 후 기름값은 지금 같이 3배 이상으로 폭등했다. (파리AF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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