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믿음

추석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10년도 더 지난 수련의 시절의 일이지만 늘 가슴에 남아있다.

두 돌된 아이가 재래식 화장실에 빠져 의식불명인채로 후송돼 왔다. 의식이 없고 자극에 대한 반응도 약해 호흡기에 의지한 채 일주일이 넘어갔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들은 성스러울 정도로 인내심을 보여줬다. "선생님만 믿겠습니다"며 지극 정성으로 간호만 했다. 그런 정성 덕분이었는지 아이는 8일만에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상태가 호전돼 그야말로 극적으로 걸어서 퇴원하게 됐다. 그때 부모의 눈에 나타나던 환희와 감사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 뒤 몇 해 뒤의 추석때였다. 응급환자가 있어 병원에 나왔는데 바로 그아이의 부모가 마당 한가운데서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간 마음엔 꼭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젠 아이가 유치원생이 돼 그림에도 소질을 보이고 있다면서 명절이 돼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어 왔노라고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왔다. 그 이후에도 몇년동안 추석무렵이면 찾아와서 아이의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색깔 고운 크레파스를 선물로 주었다.

모든 것을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 부모에게서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환자와 의사의 유대관계가 요즘 많이 희박해졌다고 느끼는건 꼭 시대탓일까?

아기환자를 데리고 온,머리에 무스바른 아빠는 비디오를 찍고,엄마는 노트에 기록한다. 육아일기 때문이란다. 이웃집이 공사를 하는데 그 흙먼지가 날려 아이가 감기에 걸린게 아닌가, 완치는 되겠느냐,합병증은 없겠느냐,며칠만에 낫겠느냐… 수도 없는 질문이 쏟아진다. 아무리 급한 환자가 기다리고 있어도.

인간관계가 아름다운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따뜻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환자는 의사가 최선을 다해 자신을 치료해 주리라는 전적인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사이의 믿음은 지남철과 같아서 사람도 행운도 끌어당긴다. 요즘 상황에서 가장 그리운 단어는 환자와 의사간의 믿음인 것 같다.

대구의료원 소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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