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포항시 대보면 정영광·정정애씨 부부

높다란 하늘, 누런 들판… 온 나라가 지금 온통 풍성한 가을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여름 내내 흉흉한 바람과 거센 비를 몰고 분탕질치던 바다. 그러나 그마저 이 계절엔 어김없이 살찐 고기떼를 출렁출렁 몰아온다.

풍경화 속 같은 집 뒤로 논밭이 어우러진 야트막한 구릉을 베개 한 작은 어촌인 포항시 대보면 강사 1리. 한반도 호랑이의 꼬리 구룡포에서 십여 분 해안 국도를 따라 차를 달려가다 만나는 예쁜 마을. 100여 가구 마을 주민 대부분은 반농 반어,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짓는다.

4대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있는 정영광(55) 정정애(51)씨 부부. 이들 역시 여느 마을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진수 이후 5년 동안 큰 말썽 부린 일 없는 통통배 한 척에,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1천여평은 넉넉한 논. 바다 이곳저곳에는 폭당 70m짜리 그물 70폭을 쳐놨다. 문어·장어 통발도 2천여개는 된다.

여름 내내 으르렁 대며 접근을 거부하던 바다. 그러나 지금은 드디어 잠잠해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이제 정씨 부부의 손이 바빠질 시간. 가을을 따라 온 방어·오징어… 이들을 맞으려는 지금은 그물을 꼼꼼하게 손질해야 할 즈음이기도 하다.바다에 의지해 온 세월 30년. 이 부부에게 가을 바다는 어머니 같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던 부엌에서 침 넘어가는 된장찌개에 푸성귀 나물까지 곁들여 근사한 밥상으로 뚝딱 만들어 내던 우리의 어머니.

이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던 삶의 무게를 어찌 감당했으리요. 4년 동안 후두암으로 고생하셨던 아버지, 폐암으로 오랫동안 신음하신 어머니, 여섯 명의 동생들, 두 아들의 대학 공부, 그 많은 뒷바라지…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가을 바다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엄두나마 낼 수 있었을까?

젊은 시절, 정씨도 한때는 도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군 복무 마친 뒤에는 철강회사로 내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에겐 역시 바다가 삶의 터전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부부의 바다 믿음이 확고한 신앙이 됐다. "바다는 속 꽉 찬 과일입니다. 부지런만 하면 모두 잘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지요".

정씨 부부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은 새벽 5시. 지난 밤 쳐놓은 그물을 걷으러 여전히 어둠 깊은 바다로 나선다. 축축 늘어지는 그물을 당겨 잡은 고기를 공판장에 내고 나면 어느새 해가 중천. 낮 동안에는 논 일을 하고, 그물 고치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 이번엔 오후 5시. 잘 손질된 그물과 낚시를 통통배에 싣고 다시 바다로 나갈 시간이다. 달님의 배웅을 받으며 항구로 되돌아 오려면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

이제 곧 가을이 더 깊어지면 바다도 더 얌전해지리라. 그럴 즈음 부인 정씨는 해녀가 될 터. 물 속으로 자맥질한 노련한 사냥꾼의 바구니는 금세 전복·해삼·성게로 가득 찰 것이다. 해녀 특유의 신경통 덕에 기상 예측에도 자신이 있다. 음흉한 저기압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은 몸이 먼저 알아 차린다.

동네 방파제가 짧아 폭풍 주의보만 내려도 구룡포까지 통통배를 옮겨 놓아야 하는 일이 성가시다. 30분이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그런 상황의 캄캄한 밤 바닷길은 멀기만 하다. 동네 젊은이들이 하나 둘 더 큰 항구를 찾아 떠나는 광경 또한 오래 전부터 가슴을 내리 누르는 일이 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것 또한 세월이 요량할 일. 자식들이 모두 건강하고 제 일에 충실한, 그런 고마운 일도 함께 하지 않는가? 머리카락을 갈라 놓으며 상큼한 바람으로 이마를 시원케 해 주는 가을 바다. 살찐 고기를 품어 무거워진 그물이 팔뚝으로 느껴지는 이 기쁨 역시 너무도 고마운 천복이 아니랴….

부부의 얼굴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미소가 묻어 나고 있었다.

曺斗鎭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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