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추의 고장 영양에 가면

벼와 수수, 대추 등 가을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들녘을 달려보자. 신선한 가을공기를 들이키면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찌꺼기가 말끔하게 씻겨져 내린다. 같은 값이면 가을에야 제 풍광을 들어내는 경북의 최오지 영양 땅을 밟아보자. 늦여름에서부터 가을까지 비탈진 밭을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고 있는 고추가 풍부한 고장이 바로 영양이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쬘수록 맵시와 빛깔을 더해가는 고추는 가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농산물.

영양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산수의 정령(精靈) 때문인지 문인(文人)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문단에 데뷔, 1935년 사재를 털어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한 오일도를 비롯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라면 더이상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해발 600~700m 지대에 위치한 영양은 햇빛이 많고 바람이 잘 통해 예로부터 고추농사가 잘 된다. 영양고추는 맵고 달콤하며 껍질이 두꺼워 가루가 많이 나는 등 맛과 품질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영양지역의 고추재배 면적은 2천135ha, 생산량은 연간 5천100여t으로 340억원의 농가소득으로 이어지고 있다.

햇고추 출하가 본격화 되면서 4일과 9일 등 5일마다 서는 영양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 영양장에 가서 고추를 사면 수입산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고추를 팔러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끼리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 영양군청 유통특작과(054-683-2364)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현지의 고추시세는 600g 1근당 3천700원~4천원선. 고추시장은 어둠이 걷히면서부터 서기 때문에 가급적 이른 시간에 찾아야 한다.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고추 수집에 나서기 때문에 대개 오전중에 파장이다.

현지의 군특산물직판장(054-682-6662)에서도 건고추와 고춧가루, 고추장, 메주, 된장, 간장, 사과, 벌꿀 등 특산품을 살 수 있다.

고려시대에 붙여진 지명을 그대로 쓰고있는 영양에는 불교유적 등 가치있는 문화유적도 즐비하다. 대구서 중앙고속도를 타고 남안동 IC에서 내려 국도를 따라 영덕방면으로 40분이상 달리면 청송군 진보면소재지가 나온다. 여기서 31번 국도로 영덕 방면으로 향해 가다보면 '월전 검문소'가 앞을 가로 막는다. 여기서 좌측으로 난 신작로가 영양을 관통한다. 아직도 깨끗한 물길을 자랑하는 반변천을 끼고 달린다.

군계에서 우측으로 난 도로로 5km쯤 달리면 석보면 소재지(원리리)가 나온다. 이곳은 '그해 겨울' '황제를 위하여' 등을 저술한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요, 그의 소설 무대로 등장하는 두들(언덕)마을이다. 조선 인조때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 낙향, 개척한 이후 후손인 재령이씨들이 중심이 돼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문화마을로 지정된 상태다. 30여채의 고가(古家)가 그대로 보존돼 있고 마을 어귀에는 석계선생 부인 정부인 안동장씨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이문열씨가 연중 8개월간 머무를 계획인 '이문열문학연구소'가 다음달 완공을 앞두고 막바지 손질중에 있다.

여기서 되돌아 나와 영양읍 방향으로 향하다 입암면 소재지에 못미쳐 좌측으로 난 5m폭의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타고 불과 2km쯤 들어간 곳, 반변천가(산해리)에 국보187호인 봉감모전석탑(높이 11.30m)이 당당하게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때 축조된 이 탑은 현재 비바람에 의한 부식 방지를 위해 치료를 받고 있는데 다음달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입암면 소재지를 벗어나 선바위와 남이포를 바라보며 10분쯤 간 거리(연당리)에서는 조선시대 민가 정원의 백미로 불리는 서석지가 한아름 연꽃을 품은 채 아늑함을 자아내고 있다. 이곳에서 영양읍을 향해 뻗어간 국도 주변에는 보물 제610호인 십이지삼층석탑, 경북도유형문화재인 모전5층석탑 등이 역사를 새기고 있고 영양읍 화천리에는 보물인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영양군소재지에서 일월면소재지에 도착, 봉화방면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으로 운을 떼는 '승무'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이 마주한다. 내친김에 골짜기를 비집고 들어서면 나무가 울창한 계곡이 이어지다가 해발 1천219m 높이의 일월산(日月山)에 다다른다.

되돌아 나와 수비면사무소 앞을 지나 왼쪽 골짜기로 접어들어 끝까지 올라가면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나?"싶을 정도의 오지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 사람들은 농사도 농사지만 산나물을 뜯어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수비면 소재지에서 본신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울진 백암온천 쪽으로 난 호젓한 길이 있다. 이곳에는 절벽 위에까지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 나무 틈새로 흐르는 물안개, 험한 산세에도 미끄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고목 등 태고의 신비로움이 그대로 간직돼 있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녹음의 풋내음과 고목의 자태는 깊은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공기와 더불어 오싹함을 느끼게 할 정도다.

수수와 벼가 일렁거리며 몸을 비벼대는 농촌 들녘, 알맞게 여문 사과를 따는 농부의 너그러운 모습, 고추 말리는 풍경 등을 보고싶다면 대구~하양~영천~청송~영양 길을 택하면 3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여유가 있다면 오는 길에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 약수터에 들러 철분이 듬뿍 함유돼 빈혈 등에 좋다는 약수를 한모금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한통 받아와서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면 새파랗게 변한 쌀을 보고는 아이들이 신기해 할 것이다. -黃載盛기자 jsgold@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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