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결승진출 좌절 여홍철 은퇴키로

시드니 올림픽 초반전에서 한국팀의 성적이 예상대로 거둬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한국체조사상 첫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여홍철(29.대산기업)이 1년 유예기간을 두기는 했지만 사실상 19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 16일 종목별 예선을 겸해 열린 남자단체 예선 뜀틀에서 11위에 그쳐 결승진출이좌절된 여홍철은 "후배들의 길을 터주기 위해 태극마크는 반납하고 소속팀을 위해서만 1년정도 선수로 뛸 것"이라고 밝혔다. 한체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국제심판의 꿈을 키우고 있는 여홍철은 국제체조연맹에서 '여'(yeo)라고 부를 정도로 자체기술을 개발했을 정도로 튐틀에 관한 한 한시대를 풍미했다. 관련기사)

은퇴를 결심한 여홍철이 걸어온 길=

여홍철은 광주학강초 5학년때 체조에 입문한 이래 가시밭길같은 선수생활을 홀로 싸우며 세계 뜀틀계에 이름을 남겼다. 체조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인 중학교 1학년때 왼쪽 팔꿈치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생겨 체조를 그만 둬야하는 절망에 빠졌으며, 그때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여홍철은 비교적 팔을 적게 쓰는 마루운동, 뜀틀만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반쪽 선수'의 길을 걸어야했다. 경희대 1학년이던 지난 90년 국가대표에 선발됐지만 후배인 유옥렬(91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92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동메달)의 그늘에 가려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성적도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9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7위에 머물렀고,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단체전에서만 뛰었다. 그러나 여홍철은 세계적인 선수로 잘 커나가던 유옥렬이 허리부상으로 선수생활을 할 수 없게되자 훈련강도를 높였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차지, 국내 1인자는 물론 아시아 1인자가 됐다. 그러나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던 96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와 애틀란타올림픽에서 마지막 착지가 나빠 잇따라 준우승, 세계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분루를 삼켰던 여홍철은 국제대회에서의 문턱을 실감, 특유의 끈기와 전략으로 새로운 체조인생을 향한 힘찬 항해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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