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신문 대입논술

---쟁점리뷰-변화와 위기

인류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지난 1만년동안 꾸준히 증가되어 왔고, 그러한 증가는 세계를 변혁하는 주요한 동력의 하나로 작용하여 왔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수많은 문화사가들은'문자'의 발명과 전파가 지니고 있는 혁명성을 인정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가 그야말로 혁명적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종이'와 '활자'라는 또 다른 기술적 수단의 발전을 기다려야만 했다.

15세기를 전후하여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한 인쇄 기술은 세계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소비할 수 있는 글을 읽을 줄 아는 대중의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으며,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그리고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져 근대적인 '시민' 계층을 탄생시켰다.

다양한 통계 자료가 증명하다시피 20세기에 이루어진 지식과 정보의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이와 같은 지식의 폭발적 증가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통신 매체'의 발달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위성 통신이나 컴퓨터 통신이 가져다 준 새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진부한 것이 되었지만, 그것의 혁명적인 능력과 미래적 가능성은 아직도 다 발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18세기와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출판물과 신문이 맡았던 역할을 대신한 새로운 통신 매체의 발달은 동양과 서양의 거리는 물론이고, 사회적 신분의 수직적 거리를 없애는 데에도 이전의 출판물이나 신문과는 비교될 수 없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였다.

통신 매체의 혁명적인 발전으로 인해, 이제 인류는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명된 그 어떤 교통수단으로도 이룩될 수 없었던 전 세계적인 '정보의 동시적 공유'가 바야흐로 가능하게 되었고, 지구상의 모든 세계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라는 새로운 관념이 탄생되었다.

또 그 하나의 세계, 즉 '지구촌'의 동향과 정보에 일상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정보 소비자들이 대량으로 탄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시간에 의한 공간의 괴멸'이라는 데이비드 하비의 용어는 이러한 상황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점차로 속도를 더해 가고 있다는 데에서 생겨난다. 대체로 인간의 수명을 60년 내외로 본다고 했을 때, 사회적 변화의 사이클이 60년보다 긴 경우와 변화의 사이클이 60년보다 짧게 축소되는 경우에는 커다란 차이가 발생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능력은 무한할지 모르지만, 개별적인 인간의 능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20년 정도의 학습을 통해 사회화되며, 그 학습 과정에서 습득한 기술과 지식, 가치관을 가지고 나머지 40년 정도의 생계수단을 마련해야만 한다. 그러나 변화의 사이클이 점차로 줄어듦에 따라 이제 유소년기 혹은 청년기에 습득한 기술과 정보가 장년기에 이르러서는 쓸모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리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발견하게 된다.

'평생교육'이나 사회적 '재교육'이라는 단어는 이미 흔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심각한 문제는 국가적, 세계적 단위에서의 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가운데 하나인 '국가 기구' 혹은 '정부'가 (국가 기구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그러한 변화의 주도·통제자로서 역할했다) 이제는 그 역할을 담당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점차로 현실성을 더해 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제 아무도 이 변화의 물결을 통제하고 기획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심지어는 정확한 예측조차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감이 현대인들의 일상적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라 할지라도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더욱 광폭해진 자본의 횡포와 무질서한 정보의 홍수 앞에서 인간 개개인의 삶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고, 그러한 필요성을 느낀 시민들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합치는 것 또한 우리 시대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변화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 변화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 변화의 물결을 따라잡기 위한 실제적이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 변화를 창조적으로 주도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시민들 사이의 협력과 연대가 필요할 것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역시 변화와 물결을 과감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요구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뚜렷한 자기 삶의 목표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변화의 소용돌이 휩쓸려 가다보면, 자칫 자신의 목표 의식을 상실한 채 맹목적인 경쟁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있는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며, 개성적인 심미안과 정서적 취향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무리 예측 불가능한 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성실하고 너그럽고 여유 있는 삶의 자세는 아직도 그 유효성을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6차문제 최우수작

건국한 지 반세기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우리 사회에는 벌써 고질적인 폐단들이 쌓여,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개혁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개혁 작업에 있어서는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는 등, 추진력이 떨어져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20세기 초 개화기 이래, 또 한번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이야기되는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고질적인 폐단들을 지닌 채 맞게 된다면, 다시 한번 시대의 낙오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혁을 추진해 나갈 때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비정상적 근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제도는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국민의 합의에 의한 일관된 원칙 없이, 선진 사회의 제도를 표면적으로만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이는 필연적으로 제도의 미비함을 초래했고, 이 미비함은 인습과 관행으로 메꾸어지게 되었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끼워야 하듯이 이에 대한 개혁도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되어야 한다.

앞서 사회의 모순은 원칙이 무시되고 그 자리를 인습이 대신하는 경우 발생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원칙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인습은 기득권 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주도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또 이렇게 형성된 인습은 다시 기득권 층의 힘으로 돌아와 사회의 모순을 더욱 공고히 한다.

이런 일련의 모순들은 모순된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구성원들은 여기에 적응하게 된다. 개혁에 제동이 걸리는 것은 이 문제 때문이다. 개혁은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하는 것이니 만큼 사회 변동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변동은 자신들의 힘이 위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기득권 층과 변동에 따른 혼란을 우려하는 수구세력의 반발을 사게된다.

이들의 반박 논리는 개혁의 취지는 좋지만 현실에 맞지 않아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개혁 정책이 미비해서 개혁의 명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때 반박 논리는 힘을 얻는다. 그 결과 이들은 근본적인 개혁을 임기응변적 개혁으로, 전반적 개혁을 부분적 개혁으로 축소시킨다. 이 과정에서 개혁은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정당성을 잃어 미진한 채 끝나게 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정부는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지만 사회적 폐단의 핵심을 쇄신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있는 의약분업문제만 해도 그렇다. 개혁의 본질은 국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진료와 약의 조제를 분리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 사회적인 요구사항을 당사자들에게 납득시키고 이에 부합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가시적 성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국민 복지증진이라는 명분에 부합하지 않는 미비한 정책을 제시했고 이는 의사들이 개혁을 거부할 수 있는 빌미가 되어 개혁을 국민 복지와는 상관없는 이익집단간의 흥정으로 변질시켰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법제의 엄절함'을 강조했다. 목표를 잡고 길을 가야 곧게 갈 수 있듯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분이 있어야 일관성 있는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합의해서 도출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치들이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된다. 일련의 개혁들이 이를 염두에 두고 일관성 있게 추진된다면 수구적인 기득권 층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학근(경북고 졸업)

---56차문제 총평

56차 논술 문제는 최근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개혁에 대해 학생들이 얼마나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는지, 또 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충분히 글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여 시사성 있는 논술문제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의도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경북고등학교 졸업생 이학근 군의 글을 최우수작으로 선정하였고, 포항고등학교 2학년 이경우 군의 글을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이학근 군의 글은 논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군말 없이 논지를 전개하여 논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돋보인다. 논제 파악 능력, 표현 능력이 뛰어나다.

서론에서 화제 도입 과정이 머뭇거림 없이 논제로 직접 향한 점이 논제의 성격과 맞아떨어졌으며, 문제제기와 논제 확인도 분명하여 나무랄 데 없는 서론 쓰기가 되었다. 본론에서는 논지를 단계성과 연계성을 유지하면서 전개하려고 애쓰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점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내용이 늘어지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즉, 이학근 군의 글에서 본론의 첫째 문단은 사실 서론의 문제 제기를 상술한 것으로 버리기에 아깝더라도 과감하게 버리든지, 서론의 문제 제기 부분에 적절히 사용하든지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본론 넷째 문단에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것에 대해 구체적 예를 보인 것은 잘 되었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주제문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 즉, '명분에 바탕한 일관성 있는 개혁'이라는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 뒷받침 내용은 상대적으로 글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점이 아쉽다.

즉, 본론 끝 부분에서 결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허전하다. 마지막으로 용어문제에 대해 한 가지 지적하겠다. 본론 둘째 단락에서 사용된 '인습'은 '관행'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겠다. 그리고 이 '관행'이 굳어져서 '인습'으로 변함을 얘기해 주면 더 쉽게 독자의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글은 친절하게, 즉 쉽게 쓰는 것이 좋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이경우 군의 글은 일관성 있는 논지를 유지하고 있는 점은 좋다. 그런데 본론 전개 과정에서의 단락 간의 관계, 분량 배분의 균형 등에 대해서는 더 다듬을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점만 보완되면 손색없는 논술문이 되겠다.

---58차문제

문제 : 아래 제시문들은 학문을 하는 이유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 ㈏, ㈐의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학문을 하는 이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가) 인간이 학문을 하는 까닭은 나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만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직 성인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치를 밝히는 것이 아직 분명하지 못하고, 법칙으로 삼는 것이 없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따라가며, 능력이 높은 자는 지나치고 능력이 낮은 자는 미치지 못하는데도 자기의 지나침과 모자람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나의 마음이 천지 성인의 마음과 다름이 없다면 어찌 학문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희, '석자중에게 보내는 답장(答石子重)' 중에서

(나) 학문을 하는 것은 즐거움과 장식(裝飾)과 능력을 위해 도움이 된다. 즐거움을 위한 효용은 혼자 한가하게 있을 때 나타난다. 장식으로서의 효용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나타나고 능력을 위한 효용은 사물을 판단하고 처리할 때 나타난다. 학문에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나태다.

그것을 지나치게 장식용으로 쓰는 것은 허세다. 하나에서 열까지 학문의 법칙으로 판단하는 것은 학자의 버릇이다. 학문은 천성을 완성하고, 경험에 의하여 학문 그 자체가 완성된다. 학문이 경험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으면, 학문은 너무나 막연한 지시를 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제적인 사람은 학문을 경멸하고, 단순한 사람은 학문을 숭배하며, 현명한 사람은 학문을 이용한다. 왜냐하면 학문은 그 자신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문 바깥에 있는, 학문을 초월한 관찰자로서 얻어지는 지혜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학문에 관하여' 중에서

(다) 우리들은 학문이 없는 미개인에 비해 자신의 생활 조건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령 전차에 탔을 때 우리는 전문적인 물리학자라면 몰라도 나머지 대부분은 그것이 움직이는 이치를 잘 모른다. 그에 비해 미개인은 그날 그날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어떤 옛 가르침이 유용한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만큼 자신의 생활 조건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많이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배워서 알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나의 생활에는 어떤 신비롭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할 이치가 없다는 것. 오히려 모든 것은 원칙적으로 예측에 의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학문은 모든 형태의 주술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킨다. 오늘날 우리들은 미개인처럼 주술에 호소하여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할 필요가 없다. 기술과 예측이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이유이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중에서

▨응모요령

글의 길이는 빈칸을 포함하여 1,500자 안팎(±150)이 되게 할 것.

제목을 쓰지 말고 본문부터 시작할 것.

원고마감 일자 : 9월 30일(토요일)

우편으로 응모할 경우 봉투 겉면에'제58차 학생 논술 응모'라고 반드시 쓸 것.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71 매일신문 논술 담당자 앞 (우) 700 - 715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166 일신학원 논술 담당자 앞 (우) 700 - 412

학교와 학년, 집 전화번호를 밝힐 것.

당선작은 본지에 강평과 함께 게재. (상장과 부상은 학교로 우송함)※ 인터넷으로도 원고를 접수합니다.

매일신문- kjk@imaeil.com

일신학원- ilsin@ils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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