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수돌칼럼-'올림픽 경쟁력'과 삶의 가치

지금 호주의 시드니에서는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다. 나라마다 금메달을 따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본 경기가 시작된 지 10일 정도 된 지금 미국이 금메달 21개, 은메달 12개, 동메달 19개로 단연 1위를 달리고, 그 뒤를 중국, 프랑스 등이 잇고 있다. 한국은 독일, 영국, 일본 등에 이어 12위다. 한때는 '톱 10'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올림픽 경기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라마다 '올림픽 경쟁력'을 높이려는 과정에서 보다 더 중요한 삶의 깊이를 놓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많이'라는 신기록 만들기 구호 속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가치들을 마치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인 것처럼 내면화하고 만 것이 아닐까? 누가 누가 더 잘하나, 과연 우리 나라 선수가 이기나, 어떤 나라가 메달을 더 많이 따느냐 따위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올림픽과 같은 만남의 장을 통해 '건강하게 인정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그런 삶의 가치를 서로 확인하고 공유하려는 방향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올림픽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끊임없는' 신기록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한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에서 기존의 신기록이 깨지고 다시 새 기록이 나오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또한 그러한 승리자들에게 평생을 먹고살고도 남는 돈을 보장할수록 범지구적 신기록 경쟁은 어느덧 '자기동력' 속에 빠져 마침내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고까지 믿게 된다. 한계를 알고 한계를 넘어보려는 도전적 자세는 필요하지만, 한계를 아예 모르게 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기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예전에 황영조 선수가 코치나 국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뛸 수 없다'며 중도 하차한 것은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한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반면에 메달 경쟁과 국가 체면을 내세워 선수들을 마치 '무한 기계'처럼 달리도록 몰아간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는 바로 그러한 올림픽의 신기록 경쟁 논리가 우리의 일상과 노동 세계에까지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세계 자본주의는 무한 경쟁을 부채질하며 모든 나라, 모든 회사들에게 '올림픽 선수급 노동자'를 모범적인 인간상으로 강제한다. 그래서 가족과 동료를 배려하며 평화롭고 여유롭게 일하는, 그리고 인간적 사유를 해가며 일하는 그런 노동자가 아니라, 마치 눈가리개를 쓴 마소처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경쟁력 있는, 부단히 신기록을 내는 노동자만이 대접을 받게 되는 그런 풍토가 우리의 일상과 노동 현장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런 풍토는 그 가족들과 이웃들에게도 해롭지만 결국은 자신에게도 해롭다. 그 개인은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며 정신적, 신체적 고통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직의 승리와 나라의 승리를 위해 한 평생 '희생'하는 것이 보람이고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한다. 결론은 불행하게도 치유하기 어려운 질병이거나 과로사이다. 우리는 이미 98년에 시티은행의 젊은 지점장이 '회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한 일을 기억한다. 지금도 매일 2, 3명은 오직 열심히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죽는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공인받지 못하는 죽음을 합친다면 매일 5명은 될 것이다. 혹시 살아있어도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 충족과 내면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결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된다.

결국 금메달 경쟁과 형식적 친선이 아니라 서로 어깨를 진심으로 두드려주며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갖는 그런 올림픽이 필요하며, 또 그런 정신에 바탕한 일상과 노동 문화의 근본 혁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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