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월산-16)야생동물

영양읍내에서 일찌감치 월자봉으로 향했다. 여름내내 조용하던 일월산이 분주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일자봉으로 향하는 굴참나무밭이 온통 다람쥐로 뒤덮였다. 도토리를 물고 이 나무 저 가지로 오르내리는 다람쥐들. 웬 다람쥐가 저렇게 많을까.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찬 겨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용하게도 알고 있는 조그마한 다람쥐.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월자봉 가는 길에 다시 찾은 황씨부인당. 기도하는 여인네들이 부쩍 늘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모두들 회색빛 보살바지가 새벽 이슬에 젖어 있다. 여름내 치성을 올려온 그네들. 무표정이다. 아직도 영험을 얻지 못한 것일까. 문득 산꼭대기서 흘러 내리는 한기가 마치 겨울 같다. 가을 차림이 이제 춥다. 오늘따라 부인당 입구 참나무를 지키고 있는 까마귀떼도 잔뜩 움츠리고만 앉아 있다.

한나절쯤 되자 사람들이 치성에 쓴 고기와 과일, 곡식 등 제물을 주변 산에다 뿌렸다. 갑자기 황씨부인당 주변은 새들로 가득찼다. 평소 20여마리 정도의 까마귀떼가 금세 두세배로 늘었다. 산까치(어치)와 산비둘기도 무리지어 찾아 왔다. 먹이감을 받은 새들은 저마다 지저귀며 시끌시끌 떠든다. 간혹 족제비도 보였다. 그래도 새들은 아랑곳 하지않고 사람들이 베푼 만찬을 즐겼다. 민초와 닮은 새들. 쉽게 먹이감을 구할수 있는 터라 아예 이곳에서 자리잡고 번식까지 한다.

'음산하게 웬 까마귀가 이렇게 많나'고 물어볼 참에 기도객 이성정(64·여·경남 산청군)씨가 먼저 일행을 힐끗 쳐다 보고는 혼자말처럼 중얼 거린다. "까마귀는 산신님의 심부름을 맡고 있지요. 이 산에 모든 새들도 산신님이 지켜주고 있어요" 까마귀에까지 정을 담뿍 주는 그네들. 어떤 생명체도 소중히 여기며 감히 해코지못하는 그네들의 마음. 그렇다. 아무 죄없는 까마귀에게 음산한 새, 저승사자라고 굴레를 씌운 건 바로 인간들이다. 자기 욕심에 차지 않으면 남을 헐뜯으려 드는 게 인간들이다. 선입견으로만 대한 까마귀. '무죄'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맴돈다.점심 때가 돼서야 월자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일월산은 수많은 중봉(中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울진 백암산, 수비면 검마산이 눈아래로 보인다. 일월산 줄기는 멀리 봉화 청량산과 청송 주왕산, 안동 학가산으로 이어졌다. 동행한 포수 손대웅(57·영양읍 화천리)씨가 남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문을 연다.

"멧돼지가 떼를 지어 출몰해 옥수수, 고구마밭을 뒤지는 곳이 저기 보이는 청기면 가곡리 일대입니다. 산짐승 피해가 가장 많은 곳이지요. 돼지떼가 지나간 밭은 마치 불도저로 밭을 갈아 엎은 것 같아요" 멧돼지 피해를 몇번이고 반복하는 손 포수. 오랫동안 멧돼지를 잡아보지 못해 손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그는 산짐승 피해를 구실로 수렵허가를 받고 싶어 했다.

일월면 찰당골에서 송곳니가 손가락만 하고 무게가 300근이 넘는 멧돼지를 잡았다는 손 포수의 무용담은 일월면 도곡리 쿵쿵목이 야산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는 가지 뿔이 달린 숫노루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일월면 오리리 등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일월산 자락에는 멸종된 직전의 노루가 50∼100여마리씩이나 살고 있다고 했다. 갈색털에 뽀얀 면송이 엉덩이를 치켜든 날씬한 짐승. 밀렵꾼들의 등쌀에도 아직도 무리지어 살고 있다니 말만 들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수비면 죽파리와 울진 백암산 경계지점인 대산골 절벽 일원에는 아직도 산양이 열댓마리가 살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사냥꾼들만 알고 있는 천연기념물 산양 서식지. 야생동물 보호책에 구멍이 뚫렸나. 10여년전 늦가을 오후 수비면 수하계곡에서 맞닥뜨린 반달곰을 잡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 하기도 한 손 포수. 월자봉 정상에서 자신의 사냥 경험을 브리핑 하듯 자랑스레 이야기 했다.

산짐승 피해 현장을 찾아보기 위해 산을 내려오자 마자 곧바로 청기면으로 향했다. 청기면 가곡리 일대에는 200여평이나 되는 고구마밭을 온통 헤집어 놓은 멧돼지 피해 농지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벼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골짜기 다락논은 추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벼이삭을 싹쓸이 훑어 갔다. 피해 지역은 가곡리에서 당리 찰당골까지 이어졌다. 돌문이, 곳집마, 자시목이 등 자연 부락마다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 멧돼지떼 습격으로 벼논이 삶아 놓은 듯 쑥대밭이 된 조정식(56·청기면 가곡리)씨 등 주민들은 "밤새도록 밭에 라디오를 켜놓고 산짐승 쫓는 가스대포를 뻥뻥 쏴대도 말짱 헛일이었다"며 울상을 짓는다.

범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더니 일월산의 야생동물 먹이사슬 정상은 멧돼지가 차지한 것일까. 손포수는 올해는 3배 가량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 지난 봄 강원도 일원에서 발생한 산불로 그곳 멧돼지들이 이동해 온 것 같습니다. 멧돼지가 소나무에 몸뚱이를 비빌때 빠진 등쪽 갈기털이 굴피에 끼여 있는 흔적을 어디서든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지요" 35년 엽사경력답게 일월산 일대에 사는 산짐승 분포와 이동경로까지 그는 손금 들여다 보듯 훤히 꿰뚫어 본다.

야생짐승은 서식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면 질병이 발생해 삽시간에 전염되면서 멸종으로 이어질 우려가 커진다. 일제의 해수구제사업으로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지면서 늑대와 여우가 과번식된 뒤 전염병이 돌아 자취를 감춘 것처럼 멧돼지도 지금 같은 입장이다. 이를 우려한 환경부가 지난 봄 이곳에서 잡은 멧돼지를 이용해 질병 연구를 위한 역학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멧돼지처럼 과번식된 짐승이 일월산에 또 있다. 바로 너구리다. 절구골, 항골, 안벌매, 아랫대티, 칡밭모기 등 일월산 용화리 선녀탕 일원에서 발견되는 너구리는 주둥이가 비쭉하고 눈이 치켜진 여우와 닮았으나 몸뚱이가 작고 통통하며 꼬리에 얼룩 줄무늬를 띠고 있다. 청기면 당리에서 봉화 재산면으로 향하는 지방도에서 달리는 차에 치여 나동그라진 너구리를 발견했다. "지천에 깔린 것이 너구리입니다. 살쾡이나 족제비처럼 가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오기도 하지만 피해는 기껏해야 닭모이와 개밥통을 뒤지는 정도지요" 손포수는 마리당 3만~4만원 하는 헐값에 밀렵꾼들에게도 천덕꾸러기가 됐다고 했다. 통통한 너구리가 너무 불쌍하다.

불과 10여년전만해도 일월산 자락에는 겨울밤이면 골골마다 부엉이가 울었다. 낮에는 소리개가 마을하늘 위에 높이 떠 빙빙 돌다가 병아리를 채갔다. 영양읍내 마을까지 닭서리를 하는 살쾡이와 족제비로 날만새면 시끌벅적했다. 산 북쪽 봉화군 재산면 한골과 개내골에서는 오소리굴도 심심찮게 발견됐다. 눈내린 산에서는 마을 아이들이 산토끼를 쫓느라 날저무는 줄 몰랐다.

할머니들이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속 부엉이 울음소리도, 봄밤을 적시던 소쩍새 소리도 사라져 간다. 첫여름 인사 뻐꾸기 울음마저 이제 그쳤다. 공기총이 보급된 이후 독수리도 소리개도 볼 수가 없다. 땅꾼들이 몰려 와 굴을 후벼대는 바람에 오소리도 자취를 감췄다. 웬일인지 근래에는 살쾡이도 없어졌다. 들고양이들의 극성으로 꿩도 산토끼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호랑이와 표범, 곰, 늑대, 여우, 살쾡이, 오소리가 차례로 사라지고 대신 멧돼지와 너구리, 다람쥐로 뒤덮인 일월산 자락. 군사시설이 들어선 주봉(主峰)은 텅비어 있고 중봉(中峰)에만 산짐승들이 마구 설친다. 환경과 먹이사슬 파괴로 야생동물 생태계가 뒤죽박죽이다. 호랑이가 없는 일월산, 지금 가치관마저 혼돈스런 우리 사회를 닮아가는 것일까. 호랑이 없는 세상. 권위가 무너진 세상. 씁쓰레하다. 그 옛날 호랑이가 살던 때처럼 일월산 산짐승들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던 시절을 다시 되돌이킬 수는 없을까. 시월을 며칠 앞둔 일월산. 산송이를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까지 몰려 더욱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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