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흐르는 것이 강물 뿐이랴

며칠 전 서울에 사시던 숙부가 돌아가셨다. 장례는 평소 숙부의 뜻대로 화장으로 치러 유해를 서울 근교의 한 공원묘지 납골당에 모셨다. 그동안 말만 들었지, 그리고 나도 죽으면 납골당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데는 그것도 애국의 한 방편이라고 내뱉은 적이 있으나, 정작 내가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곳은 이름이 공동묘지고 납골당이지 환경과 분위기는 그대로 공원이었다. 조금 실례될 말을 쓴다면 유원지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유해를 납골당에 안치한다면 방법만 다르달뿐 장례식이다. 망자를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의식인 것이다. 거기에는 호곡(號哭)과 눈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본능이기도 하다.

##인터넷 묘지문화

그런데 그곳에선 누구 하나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하루 20~30기의 유해가 들어오는 데도 그렇다. 사방 한뼘 남짓한 납골당 합속에 숙부를 모셔두고 오자니 지난 세월의 회억(回憶)들이 눈물샘을 짓누른다. 더군다나 숙부와 나는 네 살 차이라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싸움(?)까지 해가며 함께 커온 사이어서 더했다.

그러나 어느 틈에 동화된 것일까. 나 역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곳 분위기가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강요했고 나는 그것을 지켰던 것이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건 울음소리 대신 웃음소리 뿐이었다. 구세대인 탓일까. 엄청난 변화가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관리사무소 옆에는 별도로 사무실을 두어 사이버 묘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또한번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내용인즉 이곳 공원묘지에 가족의 유해를 안치해둔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클릭해 들어와 모니터 화면으로 만나 성묘도 하고 차례도 지내라는 것이었다. 신청할 때 고인의 녹음 테이프나 영정을 제출하면 그때마다 얼굴도 볼 수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모니터 화면으로 제사지내

나는 그곳에 홍보용으로 비치돼 있는 PC 자판을 두드려 보았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묘지와 사진과 육성이 흘러나왔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으로 숙부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굳이 서울까지 갈 필요없이 대구집에 앉아서 모니터에 숙부 얼굴을 띄워놓고 절을 올려도 좋다는 이야기인데, 아닌게 아니라 묘한 감흥이 인다. e세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직 그런 고루한 생각에 묻혀 e세대가 못된 것지는 모르지만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집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자칭 e세대란 아이들은 교통비도 안들고 시간도 번다며 바람직한 일이라 했고, 반면 어른들은 컴퓨터 켜는 건 전기료도 안드냐며, 사진보고 절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못마땅해 했다.

인구비례로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이용인구가 세계 1위라고 한다. 한때는 철의 이용량, 종이 사용량이 선진국의 척도가 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인터넷 이용량이 그것을 대신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도 이용할 데가 있고 안 할 데가 있다. 안녕하십니까,하는 이 한 마디 인사도 전화로 할 게 있고, 직접 찾아가서 할 게 있다. 찾아가서 해야 할 인사를 전화로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문화 때문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월이 가면 모든 건 바뀌게 돼있다. 문화도 생로병사 과정을 밟게 된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한테 관혼상제는 거역못할 큰 문화이다. 하지만 사례(四禮) 가운데 관례(冠禮)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져 버렸다. 언젠가는 또하나가 없어져갈 것이다.

모니터 화면을 보고 올리는 제사. 글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흐르는 것이 어찌 강물 뿐이랴. 그것을 누가 막을 것인가. 모든 것은 그렇게 흘러흘러 가버리고 그자리에 새로운 것, 낯선 것들이 싹을 틔울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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