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호기춘씨 검찰진술 '고속철 로비전말'

프랑스 알스톰사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경부고속철도 차량공급업체 선정을 위해 최만석(59·수배중)씨를 로비스트로 고용, 주로 당시 실세였던 황명수(黃明秀·현 민주당 고문) 전 의원을 통해 계약을 성사시키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고속철도 차량 공급업체 선정 로비의혹과 관련,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은 호기춘(51)씨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에 포함돼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호씨의 진술에 따르면 알스톰사는 원래 노태우(盧泰愚) 정권 시절에는 강모씨 등 2명과 공식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고, 이들은 주로 회의 개최 등 공식활동을 벌여왔다는 것.

그러나 93년 8월 우선협상대상업체 선정을 앞두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프랑스·독일·일본 등 3국이 치열한 수주경쟁에 돌입하자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측근 등 문민정부 실세들에게 정치적인 로비를 할 필요가 대두됐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 사정에 어둡던 알스톰사 한국 지사장 C씨를 돕고 있던 호씨는 93년 1월께 자신이 아는 역술인 한모(여)씨를 통해 최만석씨를 소개받았다.

C씨는 본사에 이를 정식 보고하기 전 최씨가 소문대로 문민정부 실세들과 친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식사나 같이할 겸 C 의원과 황명수 의원을 모셨으면 한다"고 청했고, 최씨는 실제로 황 의원을 C씨의 아파트로 데려왔던 것.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는 당시 한국에 출장차 와있던 알스톰사 중역 2명이 동석했고, 호씨는 이들과 황 의원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알스톰 중역들은 황 의원에게 "우리가 한국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황 의원은 "우리로서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을 도울 것"이라고 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최씨로부터 "황 의원이 알스톰사로부터 식사대접을 받은 사실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적발되는 바람에 고위층에 불려가 호되게 야단맞았다"는 말을 전해듣고 '황 의원이 실세가 맞긴 맞구나'라고 판단한 C씨는 알스톰 본사에 최씨의 경력, 문민정부 실세들과의 인맥 및 영향력, 로비능력 등에 대해 보고했다는 것이다.

알스톰측은 원래 C의원도 직접 만나려 했지만 '이사람 저사람 만날 경우 독일쪽에서 눈치를 챌까봐' 그 부분은 최씨에게 맡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93년 4월께 테제베(TGV) 생산업체인 알스톰 트랜스포트사 회장과 국제담당사장, 교통담당사장, 전무 등이 내한, C씨와 호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최씨를 만난 자리에서 '계약이 성사되면 1%를 커미션으로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고, 다음달 정식으로 '최씨의 로비로 차량공급계약이 성공하면 최씨에게 1%를 지급하고 분쟁이 생기면 스위스 법원에서 처리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통상 국제적인 사업의 경우 커미션이 3∼5%인데 1%는 너무 적지 않느냐"는 최씨의 지적에 대해 알스톰사측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깨끗하고 공정하게 차량공급업체를 선정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우리가 원래 제시했던 금액보다 1조원 가량 낮아져 커미션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커미션중 20%를 받기로 최씨와 약속했던 호씨는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며 35%를 달라고 했고, 최씨는 자신의 몫 65%를 황 의원, C의원 등과 20%씩 나누고 나머지 5%는 경비로 쓰겠다고 말했다는 것.

이후 호씨는 최씨로부터 "황 의원이 교통부 고위공직자에게 부탁을 했는데 YS가 교통부나 한국고속철도공단에 '어느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잘 안되고 있다"는 등의 설명을 들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호씨는 "실제로 (공무원들에게) 돈이 전달됐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알스톰사가 제시한 조건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최씨의 로비 덕분에 계약이 성사된 걸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우선협상대상업체 선정 과정과 관련, 지난 4월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던 한국고속철도공단 간부 정모씨는 "공단 평가단의 종합평가 결과, 알스톰사는 2만6천181점, 지멘스사는 2만5천932점을 얻었고, 양사가 제시한 가격은 알스톰사 23억7천만달러, 지멘스사 23억6천700만달러로 알스톰사쪽이 오히려 300만달러 더 비쌌지만 다른 조건들을 감안, 경제성 평가에 의한 결과를 현재가치로 환산했을 때 알스톰사쪽이 1천500만달러 가량 우리쪽에 더 유리한 것으로 나왔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당시 이 평가 결과를 거부할 수 있었던 사람은 교통부 장관과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결국 5, 6차례의 재조정 끝에 93년 8월 우선협상대상업체로 선정된 알스톰사는 94년 6월 최종 계약체결에 성공하게 됐다는 것.

이후 한국고속철도공단에서는 33차례에 걸쳐 국외분 차량대금 48억7천193만707프랑과 국내분 차량대금 3억6천736만8천293달러를 송금했고, 알스톰사는 선수금과 중도금 일부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프랑스 모은행을 통해 최씨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 홍콩지점 예금계좌에 94년 11월24일 3천530만6천362프랑(655만1천554달러), 95년 5월12일에 2천403만8천168프랑(474만1천249달러)를 각각 송금했다.

당시 알스톰사가 프랑스 모은행에 보낸 송금 지시서에는 "고객(송금인)의 이름을 밝히지 말고 이체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94년 11월28일 자신이 송금받은 돈중 229만2천850달러를 같은해 12월10일 호씨의 스탠다드 차티드은행 홍콩지점 계좌로 송금했고, 다음해 5월 165만9천350달러를 다시 송금했다.

한편 최씨는 지난해 9월28일 검찰수사 과정에서 출금금지된 후 다음달인 10월2일 오후 4시30분께 김포공항에서 미국 LA로 출국하려다 적발돼 여권 등을 압수당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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