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수돌 칼럼-유연한 노동, 경직된 생활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산천초목들은 추운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서서히 옷을 갈아입고 있으며, 알곡식과 과일들은 한여름과 태풍, 장마를 견디며 맺었던 열매를 물들이고 묵직하게 고개숙인다. 꽃이나 풀들도 씨앗을 남겨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뱀을 비롯해 겨울잠을 준비하는 동물들도 긴 겨울밤을 날 수 있게 먹을거리 장만에 한창이다. 다람쥐나 청설모도 뒷산의 밤이나 도토리를 부지런히 주워모은다. 가만히 보면 모든 동식물들은 매우 유연하게 일하고 유연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평생 직장'이나 '정년 보장'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준다. 대신 명예퇴직, 조기정년, 청년.박사 실업은 는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구조개편 과정에서 신분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적으로, 상용직에서 임시적으로, 본사 노동자에서 하청 노동자로 급변한다. 한번 실업자 대열에 빠지면 재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최근에 나온 비정규직 보호책도 되레 비정규직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삶의 안정성과 삶의 자율성이 뒤흔들린다.

현재 1천200만 노동자 중에서 그 절반이 넘는 700만~800만명은 1년 미만의 고용 계약으로 일하는 일용직 내지 임시직이며,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80% 이상은 파트타이머나 하청, 파견, 용역, 호출노동 등 비정규직이다. 여성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동일노동에 60%밖에 안 되는 차별임금을 받으며, 아직도 가부장적 권위주의, 그리고 가사노동과 직업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린다. 비정규직의 70% 이상이 여성 노동력이란 사실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말해준다이 모든 새로운 현상들을 통틀어 유식한 학자들은 '노동의 유연화'라 말한다. 겉보기에는 노동을 유연하게 할 수 있어 매우 긍정적으로 들리나 사실은 자본이 노동력을 일회용품처럼 쓰다 쉽게 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보기술, 인터넷, 디지털 경영, e-비즈니스 등이 확정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부채질된다. '디지털 경제 혁명'이나 '신경제'예찬론자들도 사실은 이런 노동 현실을 '당연시'하는 위에서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멈춰 서서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해보자. 과연 이런 식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가? 자본의 욕구와 따라 유연하고 신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노동력, 자본의 필요에 맞추어 시간과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노동력,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하여 자본과 함께 생각하고 감정과 느낌까지도 자본과 함께 할 수 있는 노동력, 바로 이런 것이 '노동의 유연화'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식의 노동의 유연화는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극도로 '경직화'시킨다. 자신의 시간, 주권과 삶의 자율성을 읽고 오로지 돈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삶, 이것이야말로 화석같이 경화된 삶이 아닌가? 아니, 이것은 차라리 삶이 아니라 죽음에 가깝다.

어떤 사람은 활기차고 모험적인 '벤처기업'이야말로 미래의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대기업의 경직성을 탈피하고 지식 노동과 디지털 기술, 창의적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노동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두운 면이 많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조사에서는 벤처기업 노동자들의 임금만족도나 직무만족도가 50% 정도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또 산업연구원의 한 조사는 '지식기반산업'에서조차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저부가가치, 저임금, 단순기술직 분야에 종사하는 비율이 더 높다며 지식 노동의 성차별화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 또 다른 보고는 벤처기업의 도산과 실패율이 생각 이상으로 높으며 극히 소수만이 성공하고 있다고 전한다. 소수의 성공조차 수억원대의 연봉과 스톡옵션(주식가치)으로 측정되는데 이것조차 당사자의 참된 행복이나 '삶의 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주지 못한다.

즐겁게 일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삶의 여유와 존재의 기쁨, 내면의 풍요, 그 자체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삶은 과연 불가능한가? 살벌한 경쟁과 사회적 분열이 아니라 생동하는 연대와 인간적 협동을 토대로 한 노동과 생활의 조화, 과연 '결실의 계절'에 어울리지는 않는 '일장춘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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