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홍경호 세상읽기-대용약겁

'참된 용기는 겁내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대용약겁(大勇若怯)'이란 말을 쓴다. 무모하게 돌진만 하고 한발 뒤로 물러 나야할 때에도 물러날 줄을 모르는 만용과는 전혀 다른 용기이다. 지금 세상에서 대용약겁이란 말을 들을만 한 참된 용사를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힘없는 아랫사람에게는 호랑이처럼 성내면서도 윗사람 앞에서는 개처럼 아부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밑의 사람한테 큰소리 치는 사람치고 윗사람한테 바른 말 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고 아부하는 아랫사람 좋아하는 윗사람은 많지만 바른 말 하는 아랫사람을 좋아하는 윗사람도 드물다유방을 도와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한신(韓信)은 젊은 시절에 몹시 가난하고 불우한 생활을 했다. 그는 매일 강에서 낚시질을 해서 몇 마리의 고기를 낚아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하루는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아서 종일토록 굶었다. 그가 무척 배고파하는 것을 본 어떤 빨래하던 여인이 그에게 밥을 주었다. 그 밥을 얻어먹고 굶주림을 면한 그는 뒷날 이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가 도살장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한 건달이 길을 막았다.

"네가 그 큰 덩치로 칼을 차고 다니며 으스대지만 겁쟁이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를 죽일 수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 보려무나! 나를 못 찌르겠거든 기어서 나의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나가라!"

한신이 몸을 구부려 그 자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서 빠져나가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참으로 겁쟁이라고 웃었다.

건달들로부터 겁쟁이라고 비웃음을 샀던 이 사람이 뒷날 천하에 더 없을 명장이 되어 전쟁마당에서 수없이 많은 공훈을 세웠다. 그토록 용감한 한신이 왜 건달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서 지나갔던가. 그는 겁쟁이라는 비난을 달게 받았다. 그는 또한 뒷날 크게 출세하고도 젊은 시절에 빨래하는 여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던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용감해야 할 때는 용감했고 물러나야 할 때는 겁쟁이라는 비웃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참된 용기이다.

섣부른 의약분업(醫藥分業)이란 조치와 이것에 대처하는 정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비겁한 정부이구나 하는 울분과 허망감을 금할 수 없다.

오늘은 의사들이 옳고, 내일은 약사가 옳다. 파업하는 의료인들을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 아니다. 이랬다 저랬다. 왼쪽이다, 오른쪽이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또한 일을 맡은 사람들은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의 말이 다르다. 언론은 어떠한가. 하루는 정부를, 하루는 약사들을, 하루는 의사들을 매도하면서 국민의 감성에만 의지한다.

치료를 못받아서 죽어가는 백성이 속출하는데도 정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다. 다른 일에서는 거짓말도 잘 하더니 이 문제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의약분업은 분명히 발전적이고 선진적인 조치임에도 분명하지만 막상 이것을 시행해보니 예상치 않던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너무 성급했다. 3년이나 4년쯤 시간을 더 두고 이런 문제점들을 보안한 다음에 다시 시행하겠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이 조치를 유보하겠다.

오늘이라도 정부가 이런 용기를 보여준다면 국민은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이 정부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과연 그럴 만한 용기를 가졌을까. 정부가 이 문제를 놓고 국민과 힘겨루기를 하는 인상이 짙다. 정부는 이것이 불만족스러운 조치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를 겁내고, 의약업계는 자기 몫을 조금 양보하는 것에도 인색하며, 국민은 국민대로 이것이 발전적인 제도인 줄을 알면서도 당장 당하는 불편을 참고 감수할 용기가 없다. 모두가 비겁하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양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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