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애인·도우미 모임 날고 싶은 자작나무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이 지난해 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땅에는 102만 9천여명이 장애를 안고 살고 있다. 그 중 약 90만 명은 후천적 장애자인이다. 우리 인구 40명 중 1명이 장애인인 셈.

그런데도 외국인들 중엔 "한국은 장애인이 없는 나라"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교통사고율 세계 선두권인 나라에 장애인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단순히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일 뿐이다. 없거나 적다는 것과 이것은 다른 얘기. 여기에 더 아픈 슬픔이 숨어 있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도무지 거리로 나설 용기를 내기가 쉽잖다. 큰맘 먹고 나선들 갈 곳도 없다. 그들에게는 비장애인 위주로 짜인 세상 그 자체가 온통 장애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격리된 채 살아 간다. 비좁고 어두운 골방이 세상의 전부.

그러나 여기 그들의 소매를 끌어 당겨 쏟아지는 햇빛과 푸른 잔디가 편안한 공원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은 모임 '날고 싶은 자작나무' 회원들이 그들.

회장이자 총무이며 행동대원이기도 한 최은실(25)씨.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모임의 거창한 이름과 달리 사무실도 없고 전용 전화도 없다. 모임 이름도 지난해 10월 발대식을 치렀던 찻집의 이름을 따 그렇게 붙인 게 사연의 전부이다.

봉사 경력 3년. 하지만 최씨는 장애인들을 돌본답시고 자기 일을 팽개치는 일이 없다. 장애인 봉사대를 만드노라 거창한 계획을 세운 일도 없고, 내일 행사를 고민하느라 벌건 눈으로 날밤 지새는 일은 더욱 없다. 장애인과의 어울림도 그저 일상이다. 너무 낯익고 평범해서 일기장 한 구석을 차지하지도 못한다.

"봉사라고요? 그 말이 우스워요. 그저 함께 어울릴 뿐입니다. 나이는 다르지만 모두 친구인 걸요". 장애인과 보내는 하루는 최씨에게 친구와 분위기 좋은 찻집에 앉아 수다를 떠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날작'의 창립 멤버 유영옥(25)씨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좀 늦은 나이인데도 대입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아무래도 모임 참석이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본인도 그러려 했다고 했다. 모임의 주체인 장애인들과 도우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몇달 열심히 공부에만 열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웬걸? 모임이 있는 날은 책상 앞에 앉아도 도무지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다를 늘어놓고 싶은 마음 때문. 결국 모임 참석을 택했다.

'날작' 회원들은 매달 한번씩 '테마가 있는 나들이'를 한다. 고상하지도 않고 눈에 띌 만큼 요란하지도 않다. 그러나 다채롭다. 매월 둘째 주 일요일이면 미리 정해놓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극장을 찾아 영화를 감상한다. 지하철을 한번도 타본 일 없는 장애인 회원들을 위해 지하철 정복에 나선 적도 있었다.

봉고차를 가진 도우미가 들어온 덕분에 지난 4월 이후엔 경주와 감포까지 나들이 하기도 했다. 노래방을 찾아 노래 솜씨를 뽐내고, 체육대회를 열어 운동신경 시합도 벌인다.

'날작'의 회원은 도우미 10여명과 중증 장애인 8명. 이들은 월 회비도 공평하게 부담한다. 대부분 직장을 가진 도우미들은 매월 1만원, 직장 없는 장애인들은 3천원.

회원들은 공신력을 갖춘 누군가의 중개로 만난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부딪치며 알게 된 사이. 도우미도 장애인 회원도 모두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친구들이다. 친구를 사귀는데 구차한 절차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날작'의 도우미가 되는 일은 만만치 않다. 무슨 대단한 임용시험이라도 치르는 듯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휠체어의 구조와 운전법을 배워야 한다. 휠체어를 밀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법, 턱을 부담 없이 통과하는 법, 내리막길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나는 법… 그래서 새로 가입하려는 도우미를 위해 휠체어 운전법에 관한 자세한 설명서도 만들었다. 40컷 이상의 사진과 꼼꼼한 설명을 덧붙였다.

배워야 하는 일은 또 있다. 봉사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일. 봉사라니!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떠는 일에 봉사라는 낱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를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힘들어요.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생활이 아니라 벌써 일이죠. 일은 돈을 받고 하는 것 아닙니까?" 최은실씨는 단호했다.

그래서 '날작'에는 회원도 아니고 비회원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자가 대여섯이나 된다. 회원이 되고자 찾아 왔지만 아직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은 정식 회원이 아니다.

일상이 견디기 힘들다면 그건 일상이 아니라 전쟁이다. '날작'은 전쟁이 아니라 일상을 추구한다. 너절하고 꾀죄죄 하지만 웃음 나는 일상 말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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