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 산책길이 오랜만에 환하다. 무슨 공사관계로 가차없이 까발겨진 붉은 산허리가 볼썽사납지만, 그래도 산허리 너머에는 아름다운 가을이 넘실 찾아와 있다. 곱게 물든 산벚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은빛 억새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음이 각박한 도심 속에서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벌써 불혹의 급행열차에 몸을 싣고 걷잡을 수 없이 내리닫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월요일을 헐어 놓으면 어느새 토요일, 그리고 한달, 일년…, 마음은 열여덟살이건만 현실의 배는 이미 멀리 밀려와 있다. 탄생과 성장, 소멸은 존재의 대질서이며 자연의 큰 섭리이거늘,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의 두께가 더 얇을 것이란 생각에 왠지 허송세월만 흘러보낸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서 철학자 야스피스도 죽음을 일컬어 인간 한계상황(限界狀況)의 으뜸이라고 했는가 보다.
그러나 생(生)의 숱한 갈등과 부침(浮沈) 뒤에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시간표가 마련되어 있음이 참으로 근사하고 기대되는 일이 아닌가! 스위프트(Swift)의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재미있는 풍자가 그려져 있다. 걸리버가 남해의 한 외딴섬에서 '죽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곳의 추장이 걸리버에게 하는 말이 걸작이다.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겁내고 싫어 하는데 이 죽지 않는 사람 한명을 데려가면 죽음도 큰 은혜임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도 그걸 것이 그들은 죽지만 않을뿐 늙지 않는 혜택은 받지 못했기에 추한 몰골과 온갖 병고와 고통 속에서 금치산자(禁治産者) 취급을 받으며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인생에 대한 작가의 위대한 통찰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을은 결실과 조락의 의미를 동시에 생각케 한다. 시듦은 곧 새로운 시작이며, 알차게 여문 씨앗이 시작을 위해 갈무리 돼야 할 계절이다.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듯이, 인생을 성실히 산 사람만이 마지막도 흡족하고 안온(安穩)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 가을 두류산 산책길에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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