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과장)

날로 쌀쌀해지는 가을날, 모처럼 새벽빛을 보러 나간 적이 있다. 어스레한 새벽에 교복입은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학교로 향하고 있다.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문득 나의 수험생 시절이 생각난다.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참고 견뎌야 했던 시절. 지금 이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어떤 꿈이 자라고 있을까. 예전의 나처럼 '닥터 지바고'를 읽고 가슴이 따뜻한 의사를 꿈꾸기도 할까.

대학 졸업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시험치는 꿈을 꾸곤한다. 끙끙대며 문제를 다 풀고나서 연필을 놓으며 뒷장을 넘기는 순간, 빽빽이 적혀있는 문제들 때문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꿈. 그런 꿈을 꾼 뒤에는 머리도 무겁고, 가슴속이 뻥 뚫리는 느낌과 삶에 대한 허무감이 밀려들곤 한다. 시험이 시작되면 한달씩이나 걸리곤 하던 본과시절, 시험 끝무렵 도서관벽에 달라붙어 서걱대던 담쟁이 덩굴이 너무 허무해 보였다. 추억속에선 그것마저 그리운 장면으로 남아있지만, 그 시절에는 열심히만 살면 밝고 희망찬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방황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빨리 더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됐으면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면서 뜨거운 정열은 좀처럼 끓어오르지 않고 과연 나의 꿈은 무엇이었나, 의문이 들기도 하고 가슴속 동굴은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이 밀려들 때면 곧잘 펼쳐보는 글귀가 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랄프 왈도 에머슨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가을, 꼬박 십년이 더 걸려서라도 한결같이 소망해야 이루어지는 그런 꿈을 가슴 속에 한번 더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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