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뇌와 좌절...대구 섬유업자들의 초상

이마를 가로지른 깊고 굵은 세월의 흔적,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 20년을 걸었더니 닿은 곳이 나락이더라는 대구 섬유업자 김봉환(53)씨의 초상이다.

그의 가슴엔 한여름 태양처럼 분노가 이글거린다. 버릇처럼 미소를 짓지만 그 속엔 뜨거운 울분이 날카로운 흉기처럼 숨어 있다. 인생 오십여 년, 웬만한 풍파는 견뎌 온 그도 가슴의 응어리를 숨기지는 못하는 듯했다.

김씨는 대구 원대동에서 나고 자랐다. '동국무역'이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선 마을. 집 앞뒤로도 크고 작은 섬유공장이 무척 많았다. 밤새 전등을 끄는 일 없는 공장을 바라보며 자란 소년의 꿈, 그것은 섬유회사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1978년, 서른 한살 되던 그 해에 기회가 왔다. 함께 자란 친구의 섬유 관련 회사 재산 관리인을 맡게 된 것. 열심히 했다. 인심도 얻었고 신뢰도 재산처럼 쌓았다.드디어 3년 후, 동업이기는 했으나 섬유공장 사장님이 됐다.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자식 공부 시키기가 힘들 만큼 가난했던 아버지의 아들, 그런 아들이 제 손으로 회사를 세우지 않았는가! 1980년대까지 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당시 아줌마들 치고 깔깔이(폴리에스테르) 치마 한 벌쯤 갖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1985년엔 단독 사업을 시작했다. 내 집을 샀고 저축도 했다. 그의 공장은 더욱 번성, 왜관·이현공단·다사 등에까지 공장을 냈다. 서울에 무역부를 두고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멕시코·일본으로 연간 300만달러 넘게 수출했다. 당시로선 그만한 수출 능력 갖춘 회사도 많잖았다.

또한번의 도약 시도.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그에겐 거칠 게 없었다. 경영을 과감히 수정했다. 대량 생산에서 탈피, '다품종 소량 생산' 전략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재고는 늘었고 개발비는 밑 빠진 독처럼 돈을 삼켰다. 많은 디자인들이 실패로 끝났다. 회사가 무너졌다. 추가 투자 여력이 달리자 중국 상해에 있던 공장도 함께 넘어갔다. 쓰러질 조짐이 보이는 공장엔 어디서나 하이에나가 몰려든다. 터무니 없는 값에 공장들을 넘겨야 했다.

부도를 내고도 김씨는 고향 대구를 떠나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빚 갚기에 내놨다. 그래서 갚은 빚이 대충 70%. 그가 주저앉아 있을 때, 지인들이 원단을 지원해 줬다. 재산 처럼 쌓아뒀던 신뢰와 인심이 빛을 발한 것일까? 컨테이너 4개, 시가 약 10억원 어치.

브라질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잘 해내겠다는 도전심이 다시 생겼다. 컨테이너를 배에 싣고 거친 바다를 건너던 1998년 1월, 그의 가슴은 바닷빛 처럼 푸른 희망으로 출렁댔다. 재기할 수 있고 말고… 10여년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비행기로 꼬박 25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브라질. 그러나 그곳은 먼 거리 만큼이나 인심도 다른 곳이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그곳에서는 철면피들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못된 브로커를 만난 것이 오직 그만의 불운일까?

1.5세 교포라는 브로커는 지구 저편에서 온 동포를 철저하게 파멸시켰다. 두 손을 잡고 걱정스런 얼굴로 위로해 주던 어떤 이들도 결국은 그의 남은 살점을 노린 하이에나로 드러났다. 찾아간 경찰은 손부터 내밀었다. 물건 값의 30%! 변호사는 한술 더 떠 50%! 그들에게 한국인은 돈뭉치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알고 보니 여기저기 피해자들. 국가가 나서서 남미 수출 거래 질서를 다잡지 않는 한 한국 수출상들의 눈물은 마르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물건을 찾기 위해 1년 6개월간 애썼다. 잠은 창고에서 잤다. 하지만 허사였다. 지난 6월에야 초라한 몰골로 귀국했다. 그리고는 이제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식구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무덤이 된 그쪽을 바라보는 다른 수출업자가 있을까봐 충고와 경고에 열심이다. "거래 상대의 역대 거래 내역을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절대로 쉽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상당수가 내미는 명함의 거창한 직함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수출보험 공사에 그쪽 신용도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섬유공장 지대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자라고, 그 쪽으로 꿈을 키웠던 대구 바닥 20년 섬유업자의 절규, 혹은 대구의 주력이었던 섬유산업의 고뇌 같이 들리기도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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