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구려 옛땅을 가다-16)수레의 제국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지은 '열하일기'에서 그는 '조선 문물이 허약한 이유'를 수레에서 찾았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없는 까닭이다. 사대부들은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을 연구할 생각은 않고 오로지 경전 해석에만 매달려 있다'.넓은 도로를 이용, 수레가 전국 각지의 문물을 운반해 백성들의 생활을 편하게 하는 중국의 통치와 '공자왈 맹자왈'하는 우리네 벼슬아치들의 행태가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였기에 연암은 이를 통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본래부터 수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레 문화를 제대로 꽃피우지 못해서이지 고구려는 수레에 의해 움직인 사회였다.

고구려 건국이야기 '동명왕편'에는 시조 추모왕의 아버지 해모수가 다섯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에서 수레가 번창했음을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중국 길림성 집안에서 유일하게 개방하는 오회분 오호묘. 이 벽화에는 수레의 모습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수레바퀴신'이 수레를 만들고 있으며 '대장장이 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중 총 18기의 고분에서 수레가 등장한다. 오회분 오호묘에서 동쪽으로 국동대혈 가는 길을 따라 10분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나타나는 무용총에 등장하는 수레의 바퀴는 사람 키만하다.

고구려가 서역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정벌 활동을 가능케 한 것도 수레 문화가 발달한 때문이다. 군사 활동에 필요한 엄청난 보급품은 뛰어난 수레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전문가 김용만('고구려의 발견 저자')씨는 '가마를 탄 조선인과 수레를 탄 고구려인'이라는 재미있는 비교를 했다. 조선시대는 체면을 중시한 나머지 하인들이 멘 가마를 타고 다닌 나라였다. 물건 수송도 수레가 아닌 지게를 이용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큰 길을 낼 경우 적의 침공로가 될 우려가 있다고 도로를 내는 것도 마다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반면 고구려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이동이 빠르고 멀리 갈 수 있으며 행동반경이 넓어진다.

수레가 다니려면 반드시 다리가 있어야 한다. 넓고 평평한 도로도 만들어야 했다. 도로망이 정비됐다는 것은 지방 지배가 확실하고 문물이 번창했음을 의미한다. 특정 지역에 부족한 생활물자들이 수레를 타고 옮겨져 왔다.

고구려는 대흥안령 동쪽 눈강 유역에 위치한 실위(오늘날 내몽골 부근)에 철과 금을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철을 수출하려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수많은 수레가 동원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무거운 철을 싣기 위해서는 튼튼한 수레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돌부리나 자갈에 걸려 바퀴가 쉽게 마모되지 않도록 튼튼한 철제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뒤따라야 했다.

고구려의 철제련술은 무기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당시 사용된 칼, 도끼의 강도가 현재 합금과 맞먹는 수준이었음이 증명됐으니 수레 바퀴를 만드는데도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자동차 산업의 역할을 당시 수레가 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경제력 발달의 원동력이 바로 수레에 있은 이유가 여기서 설명된다.

적의 침공을 걱정해서 도로를 만들지 않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가 고구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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