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발견은 유럽 문명에 하나의 큰 충격을 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럽의 견고한 전통적 사고 체계에 새로운 지식이 충돌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궁극적으로 유럽의 지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 오는 결과를 낳았다"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서성철 옮김, 일빛 펴냄)을 쓴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 앤서니 그래프턴은 신대륙 발견의 의미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콜럼버스의 항해로부터 책과의 전쟁에 이르는 200여 년간의 과정, 즉 지적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을 이 책에서 다각도로 생생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고전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상의 조류와 문화, 역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신대륙이 유럽의 구대륙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근대의 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같은 변화의 핵심을 고전 즉 '텍스트'에서 찾고 있다. "1550년에서 1650년사이 서구의 사상가들은 중요한 모든 진리를 고전 속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버렸다"는 대목이 이를 말해준다. 이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지성사의 영역이다. 흔히 파편적이고 지나치게 세밀하게 흐르기 쉬운 지성사가 아니라 르네상스기 유럽의 지배적인 인식의 틀을 그 대상으로 삼아 비유럽 세계 특히 신대륙을 둘러싸고 유럽 지성계에서 벌어진 지적 전통에 관해 일관되게 논의하고 있다.
신대륙 발견 이전 유럽은 중세의 질곡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시대를 거쳐 '항해'와 '발견'의 결과로 쏟아져 들어온 새롭고도 놀라운 정보, 그것을 통한 새로운 학문의 태동, 이성의 진보로 고대의 사유체계나 지식이 유럽인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의심받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경전이라 불리던 책의 권위가 무너져 가던 시점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변되는 신대륙의 발견은 다시 한번 고대의 책들에 그 권위를 실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발견으로 야기된 충격적 사실들은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고전으로 대변되는 고대 전통의 힘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경전에 대한 맹목적 신봉은 때때로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최대의 피해자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프턴은 "콜럼버스를 비롯한 수많은 탐험가들이나 상인들, 학자, 사상가들은 고전의 내용을 신봉해 경전이라는 텍스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비판한다.
1700년 영국에서 일어난 '책과의 전쟁'은 이런 고대적 텍스트와 근대적 실재성의 충돌이 절정을 이룬 사건. 고전에 통달한 전문가들은 고대인들이 자신들보다 자연, 지구의 표면이나 우주에 관해 훨씬 열등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에 동의함으로써 근대로의 확실한 진입을 보여주는 시발점이었다. 그래프턴은 물리적 발견으로부터 사고의 수용에 걸리는 이런 200여 년간의 전환과정을 고대의 텍스트를 신봉하던 당시의 철학자에서부터 항해에 나섰던 선원들, 약탈자, 선교사에 이르는 많은 이들의 보고와 저술을 통해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이 책에서 그래프턴은 유럽의 문명적 우위라는 가설에 기초한 유럽과 신대륙의 만남에 대한 기존 관점에 수정을 꾀한다. 우리 독자들에게 비록 생소한 내용이 많지만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의 유럽 사상가들을 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 책이 갖고 있는 무게가 작지 않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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